*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기차가 오지 않아도 설레는 감성 역사

푸르른 5월의 양평 구둔역

‘감성感性의 시대’가 돌아왔다. 인터넷이 일상이 되고 소셜미디어가 익숙해진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개인의 사사로운 표현 방식, 특히 감성이 도드라진 문장들에 싫증을 느꼈다. 감정이 조금이라도 넘친다 싶으면 ‘허세’, ‘자의식 과잉’ 등으로 치부하고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비꼬았다.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감성적인 것은 곧 촌스러운 것이 되기도 했다. 감성적인 것을 거부하던 흐름은 십수 년이 지나자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감성 바람’으로 역류했다. 감성적인 말들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오만가지에 감성이라는 수식이 붙기 시작했다. 가령 감성 맛집, 감성 사진, 감성 숙소, 감성 여행, 감성 코디….


여기저기 감성이 넘쳐흘러 이성이 끼어들었다간 사달이 날 것만 같다. 뇌에서 일어나는 감성 사고와 이성 사고를 뚝 잘라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다만 감성은 어떠한 과정에 머물러있다. 존재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결과값을 따지기보다 존재의 순간들을 들여다본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슬프고 허무한 찰나의 순간들. 무어라 단언할 수 없어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순간들. 그래서 말줄임표, 쉼표, 느낌표, 물음표 등을 찍는다. 누군가 구둔역을 ‘감성 역사’라고 했다. 경기도와 양평군이 발행한 구둔역 공식 소개 자료에도 구둔역의 부제는 감성 역사다. 유치한 시비 같지만 이성理性 역사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구둔역은 1940년 4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중앙선의 간이역이다. 70년 넘게 기차가 오가던 구둔역은 2012년 8월 16일, 청량리-원주 간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인해 기존 노선이 변경되어 폐역이 되었다. 엄연하게 말하면 폐역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노선 변경으로 새로 지은 역이 구둔역이라는 이름을 이어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이 구둔역에서 1km 떨어진 현재의 일신역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2013년 구둔역이라는 명칭이 일신역으로 변경되면서, 구둔역은 오롯이 폐역이 된 간이역을 가리키게 되었다. 일신역으로 이름이 바뀌지 않고 구둔역을 유지했다면 현재의 폐역사는 ‘옛 구둔역’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비록 기차역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구둔역은 어제도 오늘도 구둔역으로 존재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제 기능을 잃은 시설을 유지할 이유는 없다. 기차가 오가지 않으므로 기차역이라 부를 수도 없다. 그럼에도 구둔역이 철거되지 않은 까닭은 일찍이 2006년 12월에 등록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역사(驛舍)뿐만 아니라 광장, 일곽, 철로 및 승강장 일대가 모두 근대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건축사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남기고 보존하는 편이 이성적으로 더 나은 판단이었던 것이다. 전국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 사이에 세워진 근대건축물 중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는 건물들이 꽤 많다. 그중 폐역도 12곳에 이르기에 구둔역이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구둔역은 현역 때보다 폐역이 되고 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역의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방문자들이 기대하는 구둔역의 정체성은 여전히 기차역이다. 그 공은 미디어의 힘이 컸다. 영화 <건축학개론>,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를 비롯해 각종 영화와 드라마,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구둔역이 등장하면서 일약 ‘사진 촬영 명소’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콘텐츠가 사랑이 주제인 멜로물이거나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 스타일이어서 시골 간이역의 서정적인 분위기가 더욱 부각될 수 있었다. 이후 뾰족한 지붕의 작은 역사, 코스모스 예쁘게 피어난 철길, 구둔역이라 적힌 옛 표지판을 배경으로 찍은 일반인들의 사진이 SNS를 타고 숱하게 퍼져 나갔다. 사진들 아래는 게시물의 분류 혹은 강조를 위해 붙이는 해시태그로 ‘#감성사진’, ‘#감성역사’ 라는 단어가 자주 쓰였다.

구둔역은 이제 감성을 낳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역사는 작은 갤러리가 되었고 철로는 인도가 되었으며 벤치는 플랫폼 바깥 곳곳에 놓였다. ‘기다림’이 필요 없는 사람들은 그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간다.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른다. 머리는 덜 쓰고 마음은 더 쓴다. 그 일련의 즐거움을, 사람들은 ‘감성’이라 칭한다. 구둔역은 두물머리에서 시작해 서에서 동으로 움직인 양평 여행의 가장 마지막 코스다. 내게는 종착역이었으나 동에서 서로 움직일 누군가에게는 출발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차를 타고자 하는 이들에겐 폐역으로 쓸모없는 장소일 것이나 추억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겐 여행지로 가치가 큰 명소일 것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마스크로 가려졌지만 눈을 보면 웃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물머리가 그러했듯 구둔역에서도 쓸쓸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봄이 오고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온다. 끝과 시작은 언제나 맞물려 있는 법. 해서 여기 구둔역, 그 모든 계절이 아름답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33권 『50만 살의 청춘-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양평군 : 끝과 시작은 같다>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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