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세상 모든 이방인의 광장

평택 안정리 로데오거리를 찾아서


‘팽택섶길’은 평택시가 2015년 조성한 16개의 도보 코스다. 섶은 한복 웃옷 깃의 여미는 부분의 작은 조각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길을 붙여 우리가 알지 못했던 주변의 아름답고 짧은 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섶길을 거꾸로 읽어 길섶이라 부르고 싶다. 길섶은 길의 가장자리로 흔히 풀이 나 있는 곳을 가리킨다. 길가의 풀은 억척스럽다. 밟히고 꺾이고 흙먼지를 쓰는 일이 예사인데 그래도 뿌리를 내리고 푸른 잎을 돋아내 기어코 산다. 꽃은 가끔 행인의 시선을 받지만 풀은 그냥 풀로 눈 요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래도 길섶의 풀이 돋아 있어 길이 길임을 알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




평택섶길의 1코스가 대추리길이다. 그렇다면 캠프 험프리스를 관통하는 길인가? 그럴 리가! 평택시청에서 출발해 안성천을 건너 노와리의 대추리평화마을을 지나 안정리로 이어지는 14km의 길이다. 종점은 캠프 험프리스(K6)의 정문이다. 대추리가 없는 대추리길은 대추리가 있는 미군기지 앞에서 끝난다. 정확히는 ‘대추리로 향하는 길’일 테다. 대추리가 고향인 가수 정태춘 씨가 1985년 발표한 노래 <에고, 도솔천아>의 가사에는 고향을 떠나는 실향민의 심경이 담겨 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선말 고개 넘어 간다/ 자갈길에 비틀대며 간다/ 도두리 뻘 뿌리치고 먼데 찾아 나는 간다/ 정든 고향 다시 또 보랴/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이깟 행차에 흥 난다고/ 봇짐 든든히 쌌겠는가/ 시름 짐만 한 보따리….’


설마 영영 떠나게 될 줄 알았던가. 캠프 험프리스로 향하는 길의 길섶에는 ‘대추리길’이라 적힌 커다란 돌멩이가 종종 보였다.



안정리 로데오거리 정문 앞. 맞은 편에 험프리스 정문이 있다.


캠프 험프리스 정문 앞. 안정리 로데오거리는 송탄 신장동 일대보다 좀 더 정돈된 느낌이고 상대적으로 번화가 규모가 작다. 물론 ‘한국의 캘리포니아’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할 만큼 미군과 그의 가족들을 거리 위에서 자주 볼 수 있고 내가 첫발을 디뎠을 때 느낌처럼 우리나라의 여느 번화가와는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이다.



평택 송탄 오산공군기지(K55) 앞 신장동 일대 


캠프 험프리스는 과거 지금과 같이 규모가 크지 않았기에 부대 앞에 형성된 안정리 기지촌 역시 송탄보다는 상권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미군기지의 담장이 높아지고 미군들의 외출이 제한되면서 기지 주변의 상권이 축소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캠프 험프리스가 확장되면서 주변 상권도 부흥할 것이란 예상이 있었지만 기지 내에 대형 복합쇼핑몰이 생겨 웬만한 소비가 내부에서 이루어진 데다, 2019년 말 코로나 사태 이후 외부 출입 제한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로데오거리가 활성화되기 어려웠다.



안정리 예술인광장 입구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 거리 한쪽에는 예술인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2020년 개방한 안정리 예술인광장은 거리의 중심축이자 소통창구 역할을 한다. 생각해보면 이 거리를 걷는 대부분 사람이 ‘이방인’의 감각을 지니고 있을 터. 이방인에게 광장은 꼭 필요한 공간이다. 격의 없이 정보를 얻고 소통하며, 위험과 두려움 없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광장’이다. 광장 안에는 야외무대와 두 동의 큰 건물이 자리한다. 각 건물은 북카페, 전시실, 예술인들의 창작작업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들은 기존에 있던 여관, 안경원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서 지었다는데, 지역민이 아니다 보니 옛 모습이 남아 있는지는 알기 어려웠고 단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것’의 매끈함이 있었다.




안정리 예술인광장에서는 다양한 예술 장르의 작품 전시가 굉장히 잦은 빈도로 다채롭게 열리고 시민과 미군기지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과 이벤트도 자주 진행된다. 이렇게 활발한 전시와 예술 행사가 열리는 ‘리里 단위’ 마을은 드물다. 많은 행사가 영어와 한국어 2개 국어로 진행되고 팸플릿과 포스터는 항상 영어가 병기되어 있어 리 단위 행사여도 항상 국제적이다.


미군부대가 많았던 의정부에서 나고 자란 친구에게 부대 가까이에 살아서 나쁜 점은 없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추억이 많다고 했다. 특히 미국 독립기념일이나 핼러윈 등을 맞아 부대를 개방하는 날은 소풍 가는 날과 같았다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 부대 안에 들어가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미제 간식을 사 먹었다고 했다. 미군들과 주고받은 스몰톡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미군기지 하면 기지 설립 및 확장으로 인해 집 잃은 주민들의 애환과 수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미군 위안부 문제를 떠올렸던 터라 친구의 대답은 굉장히 의외였고 새로웠다.





박자에 맞춰 좌우를 오가는 메트로놈의 추가 전쟁과 축제, 포탄과 불꽃놀이, 이주와 정주 사이를 오간다. 추가 멈추면 죽음뿐이므로 사는 동안 우리는 비극과 희극을 일정하게 오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고장 난 메트로놈은 추가 좌우를 일정하게 오가지 못하고 한쪽에 치우친 채 째깍댄다. 고통스럽다.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참으로 힘겹다.


안정리의 메트로놈은 정박으로 움직이고 있을까. 광장과 그곳에서 행해지는 예술이 어쩌면 메트로놈의 태엽을 감는 힘이 되어 줄지 모른다. 고향을 잃은 사람, 고향을 떠나온 사람, 고향에 사는 사람, 고향을 모르는 사람, 고향이 의미 없는 사람…. 그 모든 여행자가 광장에 모여 저만의 이야기들을 풀어낼 것이다.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부딪히면서, 비극과 희극이 한데 섞일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술이 되리라. 예술이 여기, 이 숱한 이방인들의 넘치는 눈물과 지나친 웃음에 중화제 역할을 해주리라.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평택시 : 정주, 이주, 유랑의 광장>에서 발췌했습니다.




세부정보

  • 주소/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112-2

    안정리 예술인광장 문의 / 031-692-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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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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