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내 인생의 보물찾기

경기옛길, 영남길 제8길 죽주산성길 뚜벅뚜벅


얼마 전, 옛집 창고에서 오래전 일기장 뭉텅이를 발견했다. 초등학생, 아니 국민학생 시절의 일기장들이었다. 삐뚤삐뚤한 글씨체, 맞춤법도 엉망인 문장의 일기를 한참 들여다봤다. 


1994년 4월 28일 우리들은 죽주산성으로 소풍을 갔다.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1시간쯤 걸었다. 농부들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너무 많이 걸어서 좀 힘들었다. 드디어 죽주산성에 도착했다. 장기자랑과 보물찾기를 했다. 보물찾기를 할 때 나무, 풀 등 다 찾아봤지만 난 못 찾았다. 참 아쉬웠다. 쓰레기를 줍고 우리는 소풍을 마쳤다. 정말 즐겁고 보람찬 하루다.


순수했던 시절에 쓴 일기지만 마지막 한 줄은 일기를 검사할 선생님을 의식한 듯하다. 사실 내게 그날은 지치고 서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선생님들은 껌 포장지보다 작게 접은 쪽지를 죽주산성의 성안 골짜기를 중심으로 나뭇가지 사이, 풀숲 등 곳곳에 숨기고 ‘보물찾기 놀이’를 진행했다. 아이들에게는 소풍의 하이라이트였다. 쪽지를 찾으면 ‘상’이라고 스탬프를 찍은 새 공책 혹은 연필세트가 주어졌다. 눈이 밝고 움직임이 잰 아이들은 여러 개의 쪽지를 찾아냈다. 내가 엉뚱한 곳을 뒤지고 있을 때 자신의 주머니에서 다수의 쪽지를 꺼내 보이며 내게 자랑하던 소년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얼마나 얄미웠던지!



13km에 이르는 영남길 제8길의 죽주산성길. 대부분 논밭길과 산길을 지난다.


옛 일기장을 발견해 읽었던 날, ‘죽주산성길’의 존재를 알았다. 내 기억 속 죽주산성이 어떻게 변했을까 싶어 인터넷에 죽주산성을 검색했더니 죽주산성길 관련 게시물이 여럿 등장했다. 자연스레 경기옛길도 알게 되었다.

경기옛길은 조선시대에 도읍 한양과 지방을 이어주던 옛 도로로 고증을 토대로 최근 몇 년간 도보 코스로 정비한 길이다. 주요 6개 도로망 중 현재까지 정비된 길은 삼남길, 의주길, 영남길인데 죽주산성길은 영남길에 포함된다. 어린 시절, 학교부터 죽주산성까지 걸었던 약 3km의 소풍길도 포함된 구간이다. 참 아이러니했다. 어린 내게는 길고 지루했던 길이, 그래서 언젠가는 꼭 벗어나겠다고 다짐했던 길이 실은 그리도 유년시절 갈망했던 서울로 향하던 길이었다.



죽주산성길 초입에 보이는 조비산


30년 가까이 흘러서야 다시 걷게 된 그 길을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땡볕 아래 금세 지칠 것이 염려되기도 했고 마음껏 주변의 풍경도 음미하고 싶었다. 길의 시작점인 용인시 백암면 석천리 황새울마을은 처음이었다. 마을은 용인과 안성의 경계에 있어서 길을 걷기 시작한 지 10여분 만에 다시 안성으로 진입했다.

사람이 편의상 구획한 행정구역일 따름이지만 두 발로 직접 지역의 경계를 넘나듦이 묘하게 짜릿했다. 마을길 구간을 약 2km 정도 걷을 때까지 등 뒤로 내내 조비산이 보였다. 동네 사람들과 그 산을 수 차례 오르셨던 어머니는 해발은 낮아도 산이 가파르고 돌이 많아 등산이 영 까다로운 산이라 하셨다. 첫눈에 봐도 암벽이 많았는데 등산객이야 힘에 부친 산일지 몰라도 구경꾼 입장에선 매우 수려한 풍모의 산이었다. 산은 주변의 그 어떤 것도 조연으로 만들 만큼 홀로 독보적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느라 거북이 걸음이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해가 지기 전까지만 종점에 도착하자고 마음먹었다. 내 앞에 먼저 걷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설령 있대도 이 여정은 선착순 경기가 아니었다.



밤고개길


전체 코스의 1/3 지점을 걸어서야 비로소 그늘이 나왔다. 밤고개길을 지나 용내길로 들어선 지점이었는데 길 이름처럼 밤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길바닥에 떨어진 푸른 밤송이들이 아니었다면 밤나무인줄도 몰랐을 것이다. 철모르고 성급히 떨어진 과실이 아니라 연일 이어진 폭우 탓에 떨어진 열매들이었다. 좋은 때를 알고 인내해도 변수는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나보다.

밤나무 군락을 지나자 작은 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공장 건물 지대의 축대가 일부 무너져 있었다. 그 바람에 토사가 길 위에 쌓여 있었는데 다행히 길을 지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지난 장마가 참으로 유난했음을 상기했다. 자연은 축복이고 때로 재앙이다. 당연한 진리를 천천히 걸으며 비로소 깨닫는다.

곧 내장리 하장마을 안길이 나왔다.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할머니 두 분이 앉아 계셨는데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시더니 “이 더운 날 어디서 오는거여? 그늘서 쉬었다 가” 하셨다.  나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하고 가던 길을 걸었다.



죽주산성길을 걷는 내내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마주한다


경기옛길은 길 곳곳에 영남길 표지목이나 화살표 두 개가 겹쳐진 모양의 경기옛길 표식이 있어 스마트폰 없이도 길을 찾아 걷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스마트폰 속 지도를 확인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에 참 많은 것들을 의지한다. 눈에 보이는 길은 물론이고 내 미래와 같은 보이지 않는 길마저도. 참 고마운 기계라 여기면서도 가끔은 스스로 사고하려 들지 않는 나의 뇌 근육이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아예 배낭 안에 넣었다. 비봉산이라는, 죽주산성이 자리한 친숙한 이름의 산이 가까워졌다는 안정감도 한몫했다. 자연스럽게 노래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비봉산 정기 속에 움튼 어린 싹~ 비바람 몰아쳐도 굽히지 않네’ 놀랍게도 나는 20년 넘게 불러본 적 없는 초등학교 교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길은 점차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본격적으로 오르막을 오르기 전에 도시락으로 싸온 김밥을 먹었다. 




죽주산성이 있는 비봉산 정상 풍경


산길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상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이 등장했다. 숲이 울창해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늘이었다. 잠시 멈춰서면 몸을 스치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시원했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꽤 오를만하다’고 느꼈다. 시작점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 이제 비봉산 정상이었다. 해발 372m 산 아래로 안성시 죽산면과 일죽면 일대, 멀리 진천 광혜원 일대까지 시원한 풍경이 펼쳐졌다. 한동안 정상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느새 전체 코스의 2/3 지점을 걸어왔고 곧 죽주산성이었다.

나는 이제 죽주산성으로 소풍가던 그때, 내게 김밥을 싸주었던 엄마의 나이가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소풍 전날의 설렘일지, 빈손으로 돌아가던 소풍 후의 아쉬움일지 아주 오랫동안 기억 안에 묵었던 여러 감정들이 엉켜들었다. 나는 분명 앞을 보고 걷는데 기억은 자꾸 뒤를 향해 걷고 있었다.



죽주산성 남문 방향 성벽


산 정상에서 1km를 조금 넘게 내려갔을 즈음 드디어 산성의 성벽 일부가 보였다. 오래전, 허물어진 죽주산성의 풍경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그런데 성곽 위로 완전히 올라섰을 때 아주 말끔하게 복원된 죽주산성의 모습이 나를 맞았다. 성벽의 돌은 어제 쌓은 듯 희고 매끈했다. 산성 자체에 향수가 있진 않았지만 전에 온 적 없는 새로운 곳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서운하진 않았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므로 변화는 당연했다.


성곽을 따라 북벽 포루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산도 우비도 없어 비를 그대로 맞았지만 몸의 열기를 식혀줘 옷이 젖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느끼는 내 자신이 어쩐지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만 같아 괜스레 들떴다. 춤을 추듯 발걸음에 리듬을 주었더니 성곽 아래 풀숲에 있던 노루 한 마리가 내 소리에 놀라 후다닥 도망갔다. 나도 덩달아 놀랐지만 야생 노루를 마주친 경험 자체가 신기해서 멀어져가는 노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오동나무 한 그루가 멋스럽게 서 있는 죽주산성 북벽 포루


성곽의 경사를 따라 내려가자 광장처럼 넓은 터 위에 포문이, 그리고 그 곁에 한 그루의 오동나무가 서 있었다. 새롭게 복원, 조성한 영역이 분명했는데 고목 한 그루를 남겨둔 누군가의 센스가 돋보였다. 포문 앞에 서자 발아래로 올망졸망한 마을 전경을 펼쳐졌다. 어린 시절 그 동네에 살았던 친구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 아이들도 나도 생애 최초로 배운 한국사는 고려시대 송문주 장군이 몽골군을 크게 무찌른 전적지가 죽주산성이었다는 역사였을 것이다.

산세를 따라 축성된 성벽을 따라 내려가니 성벽에 둘러싸인 성안 골짜기가 등장했다.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소였다. 경사진 땅이지만 수풀 없이 널찍해서 소풍을 오면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장기자랑과 보물찾기를 했다. 보물찾기를 할 때면 어떻게 이렇게 넓은 데서 작은 쪽지를 찾을 수 있나 막막했다. 커서 보니 꽤 아늑한 산골짜기였다.



매산리 석불입상과 삼층석탑


죽주산성을 내려가 매산리 석불입상과 봉업사지로 향했다. 학교와 죽주산성을 오가던 소풍길 에서 마주쳤던 문화재들이다. 안성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16구의 고려시대 미륵상이 자리해 미륵의 고장이라고 불린다. 매산리 석불입상도 그중 하나다. 5.6m에 달하는 큰 키에 균형이 맞지 않는 신체 비례, 투박한 생김으로 인해 어렸던 내겐 괜히 무섭게 느껴지던 존재였다.

다시 마주한 석불 앞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갔던 것은 수인 ‘시무외인(施無畏印)’이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석불의 손짓이 중생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주는 의미였음을 알았더라면 석불이 조금 덜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미륵은 그렇게 홀로 천년을 같은 자리에 서서 사람들의 안녕을 빌어주고 있었다.



봉업사지의 상징적인 문화재인 죽산리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석불입상에서 밭두렁을 따라 1km쯤 걸어가니 봉업사지였다. 먼 옛날, 이 일대는 부처님을 모시던 신성한 땅이자 백성을 수호하는 고결한 땅이었다. 봉업사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 사찰로 꼽히던, 태조의 어진을 모신 큰 절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절의 흔적은 오층석탑 하나, 당간지주 하나가 전부고 그 주변은 온통 논밭이다. 그래도 천년 전 석공들이 다듬어 놓은 석불, 석탑, 석주 덕분에 그 땅이 번영했던 절터임을 안다. 그 돌덩이들이 죄다 보물이다. 나는 또 그렇게 보물을 발견했다. 관리를 받는 진짜 ‘보물’들이다. 역시나 8살 때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석물들이 이제야 내게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 봉업사지 일대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풍경 속을 걷는 나만 달라졌을 뿐.



죽주산성에서 몽골군을 크게 무찌른 송문주 장군의 동상. 죽주산성길의 종점인 죽산터미널 근처에 있다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은 5시간 만에 죽주산성길의 종착지인 죽산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코스를 다 걸었다고 해서 대단한 성취감이 일진 않았다. 그저 도착점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길, 그 길을 걸었던 모든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경기옛길이라는 명칭 그대로, 투박한 옛길 곳곳에서 무형의 ‘보물’을 얻었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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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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