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요절한 청년 시인의 고향

광명 기형도문학관을 둘러보며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 기형도, <식목제> 중 


해가 짧아 저녁이 일찍 든 어느 겨울날에 엽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기형도 시인의 ‘식목제’라는 시를 인사말로 적은 지음知音의 안부는 지난여름 광명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엽서는 한 계절이 지나 겨울에야 이르렀으나 내게 오기를 ‘어느 날 불현듯’ 하여 그저 반갑고 애틋했다. 기형도의 시는 응당 겨울에 닿아 있으니 더욱이.  


허영과 허세로 기형도와 최승희의 시를 읊어대던 20대를 추억하노라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성숙한 줄 알았지만 미숙했던 시절이라 무람없이 뻗댔기에 시인의 폐허를 볼 리 만무했다. 그래도 그 시절을 청춘이라 부를 수 있어 다행이다. 치기 어린 생각들은 청춘이라서 괜찮았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만큼 정신이 익었다면 진작에 시인이 되었을 터. 시에 재능이 없는 나는 불혹에 이르러서야 28세에 요절한 시인의 문장들을 겨우 읽는다.  


엽서를 보낸 친구와는 대학 때 만나 청춘의 여정을 함께 했다. 지난여름, 그 친구와 광명의 기형도문학관을 찾았다. 공간은 초면이었지만 그 안을 채운 시인 기형도는 책상 서랍 구석에서 발견한 낡은 원고지 같았다. 살아있다면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지만 청년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어서, 우리는 우리대로 그의 문장들을 짚어 28세를 추억했다. 엽서는 전시를 관람하고 나서 서로에게 쓴 것이었다. 문학관 로비에는 엽서를 쓰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편지함에 엽서를 넣어두면 문학관 측에서 일괄적으로 모아 수신인의 주소로 보내준다고 했다. 계절을 뛰어 도착한 엽서 덕분에 잠시 잊고 있던 여름날의 추억이 살아났다.  

시인의 고향이 광명인 것은 광명에 와서 처음 알았다. 광명동굴을 가는 길에 우연히 기형도문학관을 지나쳤고 그 이름 석자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기형도, <안개> 중 


안개의 강이 흐르는 ‘이 읍’은 70~80년대 안양천변의 광명시 소하동을 가리킨다. 당시 소하동은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재민들의 정착지였고 도시 근교 농업이 주를 이루던 지역이었다. 시 <안개>는 모든 행이 물을 머금은 듯 무겁고 축축하고 음울하다. 안개 속에 묻힌 공장, 폐수, 쓰레기, 죽음, 불행···. 기형도 시인은 광명시 소하동에서, 돼지농장 집 막내아들로 자랐다. 이 작품으로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26세에 시인으로 등단했고 1989년 28세에 숨졌다.  


그를 기리는 ‘기형도문학관’은 2017년 11월, 소하동 산144에 문을 열었다. 유명인들을 기리는 기념관들은 단지 그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건립된 경우도 많지만, 기형도는 실제 그의 작품 곳곳에 고향집 일대 풍경이 드리워져 있어 의미가 있다. 1960년생인 그는 본래 옹진군(현재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났지만 6살 무렵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으로 이사하면서 유년기의 기억과 시작詩作의 지형적 토대는 소하리에 있었다. 시심의 동기를 무엇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어릴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바로 위의 누나가 사고로 숨지는 일이 정신적 충격을 줬으리라 추측된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시를 썼고 학업에도 충실해서 늘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통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중앙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일했고 입사 이듬해 등단해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다 불현듯 세상을 떠났다.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기형도 시인은 종로3가의 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는데, 황망하고 안타까우면서도 ‘멜론이 먹고싶다’ 말하고 죽은 시인 이상보다 더 시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 죽음은 마치 스물여덟 페이지 시집의 마지막 장 같다. 


 


짧은 생에 그는 ‘빈집’과 ‘정거장’을 서성이고 ‘안개’와 ‘달밤’ 속을 걸었다. 때때로 ‘오후 4시의 희망’도 있었지만 대체로 쓸쓸했다. 어두웠다. 추웠다. 외로운 사람들은 일기를 쓰는 대신 그의 시를 읽었다. 외롭지 않은 사람들은 없어서 그의 시를 읽고 저만의 일기를 쓰는 사람들도 무수했다. 숱한 인용 덕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질투는 나의 힘’과 같은 그의 문장은 대중에 익숙하다.  


그가 숨진 해에 유고시집『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다. 시집은 그의 사후 30년간 35만 부가 넘게 팔렸다. 2019년에는 기형도 30주기를 기념해 시전집『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가 세상에 나왔다. 한국 문단에서 요절 시인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이 더 유명하지만, 청년세대를 거듭해 오랫동안 여러 편의 시가 읽히는 시인은 기형도가 유일하지 않을까.  


기형도문학관은 새로 읽고 다시 읽는 그의 언어를 경험하는 삼차원의 공간이다. 사실 문학관의 전시 구성은 기형도문학관도 여느 곳과 비슷해서 이렇다 하게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다면 이곳은 인간 기형도의 작은 집으로 시인 기형도의 검은 활자 밖 세계를 살짝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관 1층은 시인의 생애와 <빈집>, <안개> 등 대표작들을 영상과 소품을 이용해 입체적으로 표현한 공간, 지인들의 인터뷰와 시 낭송 영상 등의 전시로 꾸며져 있다. 2층은 북카페, 3층은 강당과 창작실이다. 문학관은 ‘빈집’이 아니고 그의 시를 더듬는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옛일을 추억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ᄄᅠᆯ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너머의 도시들- 경기 중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광명시 : 무용의 쓸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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