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가평, 청춘이라는 축제

재즈로 물든 자라섬을 돌아보며


축제공화국에서 ‘인생 축제’를 만날 확률


내 인생의 첫 축제는 가평의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이었다. 27세 때였으니 축제를 처음 경험하기로는 늦은 나이다. 물론 어린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구경했던 동네 축제와 학교 구성원끼리 그들만의 리그로 치렀던 크고 작은 축제들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중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함부로 쓸 수 없는 접두사 ‘첫’으로 장식된 축제는 없었다. 과거 동네 축제의 풍경은 어디나 엇비슷했다. 여러 개의 천막들이 죽 늘어선 가운데 꼬치구이와 튀김음식, 국밥과 부침개 같은 음식을 팔고 무대에서는 알록달록한 분장을 한 품바 공연단이 장구를 치고 트롯을 불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방자치제가 도입되면서 지자체마다 문화자치의 일환으로 여러 축제들이 새로 생기거나 확대되었다. 한동안은 천편일률적인 행사들로 꾸며져 축제 간의 차별성이 없었고 전시행정이니 예산 낭비니 비난도 많았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지자체들이 축제 기획자를 동원, 지역 특색을 살린 축제를 선보이기 시작한 때는 대체로 2000년대 이후다.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전국의 지역축제 및 문화관광축제 현황 보고를 보면 전국의 축제가 1004개, 경기도 내 축제만도 110개에 달한다. 이는 2021년에 개최된 축제만 집계한 것으로 코로나19로 인해 축제가 대폭 줄어든 점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은 가히 축제의 나라라고 할 만하다.




경기도에도 이천 쌀문화축제, 안성 바우덕이축제, 수원 화성문화제, 연천 구석기축제, 파주 장단콩축제 등 명성을 쌓아온 축제들이 매년 열린다. 이 숱한 축제들의 참여자들은 대개 중장년층이다. 지역축제에 20,30대 청년층이 비어있는 현실이 이제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농어촌 지역은 애당초 거주하는 청년층이 적기도 하지만, 축제 자체가 청년층에게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데다 그간 고착화된 축제의 올드한 이미지와 지역 토박이들만의 장이라는 폐쇄적 분위기까지 더해진 탓이다. 우리나라의 지역 축제가 모든 연령대가 고루 섞여 함께 즐기는 장이 되길 바라는 것은 그저 이상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축제는 기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뛰어들 수 있는 소통과 나눔의 장이다. 제의적인 성격이 약화되고 놀이적 성격이 강조된 오늘날의 축제는 더욱 더 자유롭고 수평적으로 유희를 즐기는 시공간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에 낯선 도시를 방문한 여행자에게 축제는 이방인의 두려움과 어색함을 불식시키고 어쩌면 인생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몹시 반가운 이벤트다. 여행자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면 “축제는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간을 그곳에서부터 벗어줄 수 있도록 신들이 지시한 시간과 공간”으로 지역민에게도 일상의 질서를 벗어나 신선한 자극을 주는 난장(亂場)인 것이다.


낯선 사람들과도 ‘우리’로 묶일 수 있는 공동체 의식과 싱그러운 젊음, 그리고 자유가 만발했던 축제가 바로 내가 20대에 경험했던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축제공화국에서 소위 인생 축제를 경험했으니 운이 참 좋았다. 그날의 공기가 내게만 각별했을까. 그곳에 내 청춘이 있었다 말하면 비약일까.


재즈는 청춘을 닮아서


친구 손에 이끌려 재즈의 J자도 모른 채 찾은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의 첫인상은 문화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재즈와 무슨 연고가 있는 줄 모르겠는 강 위의 섬에서 사흘 내내 재즈 무대가 펼쳐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내겐 굉장히 이색적인 이벤트였다. 나는 1박2일로 예정된 자라섬 여행을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 경춘선 기차에 올랐다. 거의 해외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대성리역을 지날 땐 마셔라 부어라 했던 지난 ‘MT의 흑역사’ 때문이었는지 술 냄새가 훅 끼쳐오는 듯했지만 가평역에 다다라선 이 축제가 꽤 멋진 기억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한 기차에서 다 같이 내려 무리지어 자라섬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그 행색과 표정이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만) ‘째지’해보였고 나 역시 그 일원이 되었음에 어쩐지 우쭐했다.



군중에 섞여 입장한 자라섬은 섬인지도 모르게 육지와 이어져 있었고 평평하고 드넓은 땅 곳곳에는 캠핑 사이트와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몇몇 무대에선 이미 재즈 뮤지션들이 공연 중이었고 춤을 출 수도, 가만있기도 애매한 그루브한 리듬 속에서 사람들은 삼삼오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몸에 닿는 늦가을 강바람은 차가웠지만 귀에 닿는 재즈는 봄바람처럼 가볍고 살랑였는데 사람들의 달뜬 얼굴은 여름처럼 청량했다. 관객들은 대부분 주전부리를 가운데 두고 술을 홀짝였는데 숱한 맥주잔들 사이로 이따금 와인과 막걸리(가평잣막걸리였는지도)를 마시는 이들도 보였다. 재즈와 술, 그리고 만추의 강섬이라니. 나는 그때 ‘이것이 축제’라고 정의했고 이로써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은 내 생애 첫 축제가 되었다. 근래에 와서 세련되고 멋지다는 의미로 ‘힙하다’는 신조어를 대중적으로 쓰는데, 그때 내 눈에 비친 축제장이 ‘힙’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재즈를 몰라도 상관없었다. 누가 거장이고 어떤 세부 장르가 있는지 꼭 알 필요는 없었다. 음악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니 말이다. 실로 재즈가 그렇다.




재즈 또한 그 역사와 갈래를 제대로 알려면 결코 만만치 않은 공부를 해야 하지만 보편적으로 재즈를 수식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자유다. 재즈는 연주자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악기의 구성에 따라 악보를 자유롭게 변주할 수 있는 음악이다. 코넷연주가로 재즈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빅스 바이더벡(Bix Beiderbecke)은 “재즈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라 했고 재즈뮤지션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은 “재즈란 자유”라고 정의했다. 전설적인 재즈피아니스트 빌 에반스(Bill Evans)는 “재즈를 분석하려는 사람들이 짜증난다, 그저 느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 재즈를 듣는 리스너의 본분은 그저 즐기면 그만이다. 그러고보면 ‘재즈’는 청춘과 닮아 있다. 수많은 명사들이 남긴 재즈에 대한 정의의 주어를 청춘으로 갈음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 말이다.




축제 당시의 몇몇 순간들이 내 머릿속에 4D 영상처럼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쌀쌀한 대기, 어둠 속에 빛나던 무대, 트럼펫의 경쾌한 소리와 둥둥둥 심장 박동처럼 낮은 울림을 주었던 더블베이스의 소리까지도. 무대가 지척인 자라섬 캠핑장에서 보낸 첫날 밤은 그저 몽롱했어서 지금 돌이켜보면 꿈인가 싶다.


황무지에 그린 오선지


2021년, 18회를 맞은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은 아시아 최대 재즈축제로 자리매김했다. 매년 늦은 가을 세계적인 재즈 거장들이 공연을 위해 이 작은 섬을 찾는다. 2004년 첫 회 때 3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순조로운 신호탄을 쏘아올린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은 해를 거듭할수록 관람객이 늘었고 9회 이후로 연간 평균 20만 명이 축제장을 찾았다. 가평군 인구가 6만 명이니 그보다 세 곱절 이상의 인파가 사흘 간 자라섬에 모이는 셈이다.






이제 가평하면 자라섬을, 재즈하면 자라섬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장르가 달라 단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국내의 대표 음악축제 중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보다 다섯 해 먼저 시작한 동두천락페스티벌보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훨씬 높게 체감된다. 동두천락페스티벌도 주로 소요산 야외무대에서 열리긴 했지만 몇 차례 주무대가 바뀐 바 있다. 또 동두천이라는 도시 자체에 '한국록의 역사'를 투영하고 있고 그보다 국소적인 축제장소 자체는 따로 부각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야외 록공연은 아티스트와 관객이 하나가 된 듯 같이 부르고 열광하는 장으로 묘사된다면 야외 재즈공연은 같이 부르기보다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쪽이다. 즉 자라섬은 축제의 장인 동시에 피크닉 장소 내지는 캠핑장처럼 느껴졌고 이는 관객들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도 유효했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장소와 음악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축제랄까.





축제는 애당초 가평이라는 큰 단위의 자자체보다 자라섬이라는 작은 단위의 섬을 주체로 내세웠다. 1회 축제 때만 해도 자라섬은 지금처럼 유명한 섬이 아니었다. 관리되지 않은 황무지 같은 섬이었고 장마철마다 섬의 일부가 물에 잠겨 써먹기도 애매한 땅이었다. 같은 시점, 직선거리로 800m 떨어진 남이섬은 2002년 방영된 인기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국내는 물론 일본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두 섬 모두 1943년 청평댐이 준공되면서 생겨난 섬으로 그 기원은 동일하다. 그러나 두 섬의 행보는 다른 듯했다. 사실 남이섬은 섬으로 들어가는 선착장만 가평군에 속하고 섬 자체는 강원도 춘천시에 속한다. 네 땅 내 땅 나누긴 뭣해도 가평군 입장에선 연일 넘쳐나는 방문객으로 승승장구하는 남이섬을 보며 자라섬의 처지가 안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면적만 보면 남이섬보다 1.5배나 큰 자라섬이다.


그리하여 가평군은 자라섬을 특별한 무대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섬에 무대를 짓는 게 아니라 섬 자체를 무대화시키는 전략이었다. 당시 공연기획자로 명성을 날리던 인재진 총감독이 자라섬 프로젝트에 뛰어들었고 그는 섬에 오선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첫 축제가 열린 직후, 사람들은 자라섬을 ‘한국의 뉴올리언스(재즈의 본고장)’라고 추켜세웠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50만 살의 청춘 -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가평군 : 청춘이라는 축제>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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