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성남문화재단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위로

영화감독 신동석

이 글은 성남문화재단의 격월간 문화예술 매거진〈아트뷰〉6+7월호의 본문 내용입니다.



여기, 아들 대신 ‘살아남은 아이’가 있다.

아들은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다 세상을 떠나고, 부부는 슬픔 속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애도하며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조금씩 아들의 빈자리를 채워가던 ‘살아남은 아이’가 그날의 진실을 밝히는 순간, 영화는 용서와 화해, 속죄와 복수의 위태로운 경계에서 질문을 던진다. 완전한 용서, 혹은 완전한 속죄란 가능한 것일까. 만일 용서에 자격이 필요하다면 우리에게는 그 자격이 존재하는가, 라고.


글 | 남소연 성남문화재단 홍보미디어부 과장


인테리어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 성철(최무성)과 미숙(김여진). 6개월 전 고등학생 아들 은찬을 잃은 부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을 이어간다. 친구를 구하고 목숨을 잃은 은찬의 의사자 지정에 동분서주하는 성철, 새로운 아이라는 희망에 매달리는 미숙. 부부의 위태로운 일상은 아들이 죽음으로 살려낸 아이 기현(성유빈)을 만나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신동석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성남문화재단의 2016 독립영화제작지원작이기도 했던 이 영화는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 장편상, 2018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 공식 초청작으로 잇따라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영화는 인물들의 감정에 과도한 개입이나 결론을 유도하지 않는다. 애증의 감정 속에서도 기현에게 일을 가르치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성철과 미숙, 세 사람의 감정을 덤덤한 듯 바라보던 영화의 시선은 ‘살아남은 아이’의 진실이 밝혀지는 이후부터 위태로운 긴장 속으로 치닫는다.


<살아남은 아이>는 어떤 계기로 구상하게 된 작품인가?
20대 즈음 개인적으로 슬픈 일들을 겪으며 오랫동안 감정 기복이 심했는데, 돌아보니 그 과정이 내 나름대로 거쳐온 애도의 기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도란 무엇인지, 진심을 담은 위로란 어떤 것인지 오랫동안 고민했던 감정이 이후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자연스레 영향을 준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가족 중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 뒤 시작되는 이야기를 쓰게 되더라. 그러다 2015년 작업한 시나리오가 <살아남은 아이>다. 쉽지 않은 주제일 수 있겠지만 꼭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함께 작업한 제작사 아토ATO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신준 감독의 <용순> 등 최근 몇 년간 호평받은 독립영화들을 만든 제작사로 알고 있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제작사라 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다. 시나리오를 마친 뒤 아토의 제정주 PD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선뜻 함께 해보자 답을 주셔서 든든했다. 가족을 잃고 시작되는 이야기도 조금은 상투적일 수 있는 소재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만의 고유한 특색이 있다. 영화의 방향성과 주제가 마음에 든다”던 PD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최무성, 김여진, 성유빈 세 배우의 열연이 빛나는 영화다. 모두 캐스팅 0순위에 두었던 배우들이라고 들었다. 배우들은 이 시나리오의 어떤 점을 보고 수락했는지 궁금하다.
쉽지 않은 감정이 많아 배우 입장에선 분명 꺼려지는 부분도 있었을 거다. 인물에 몰입할수록 그만큼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 다들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관객을 울리기 위해 고통을 강요하거나 이용하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고 하더라. 김여진 선배의 경우에는 자식을 잃은 부부라 해서 유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대상화시키거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해진 틀로 바라보지 않는 느낌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이미지 △

성철과 미숙 역에 비해 기현 역은 감정 변화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부부에 대한 감정은 어떤 것인지, 죄책감은 없는지, 어떻게 그들에게 해맑게 다가설 수 있는지, 오직 기현 자신만이 알고 있을 감정들이 많았던 것 같다. 연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듯싶은데.
성유빈 배우가 나이는 어리지만 작품 경력도 많고 워낙 연기를 잘한다. 미리 대본을 공부하고 해석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다만 설정상 비밀이 있는 아이이다 보니 시나리오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유빈이도 기현의 행동이나 심리에 궁금증이 많았다. 과거 어린 시절이라든가, 극중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빈틈을 메워주려 했다. 함께 차를 타고 어색하게 이동하던 성철과 기현처럼, 유빈이와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런 어색함을 기억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하고.

현장 분위기는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영화와 반대로 굉장히 밝은 분위기였다. 무성 선배, 여진 선배가 워낙 분위기를 편하게 해주셨다. 무성 선배는 의외로 장난기도 많으시고 한번 재밌는 입담이 터지면 쭉 가시는 스타일이다(웃음). 독립영화이다 보니 상업영화에 비해 촬영 회차가 적을 수밖에 없는데, 배우들의 철저한 준비와 연기 덕을 많이 봤다. 당시 무성 선배 스케줄이 정말 바빠서 밤샘 뒤 현장에 오실 때도 여러 번 있었는데, 피곤한 내색 없이 잠깐 리허설만으로도 바로 몰입하시는 모습이 놀라웠다. 여진 선배도 마찬가지여서, 일정상 어쩔 수 없이 감정 신이 몰려 있는 날에도 집중력이 대단했다. 좋은 연기로 작업을 편하게 해주신 만큼, 스태프들 역시 배우들의 감정이 소모되지 않도록 실수 없이 찍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다. 배우들께 감사하는 영화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이미지

인물들의 직업을 인테리어업 종사자로 선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내용상 부부가 함께 일하는 직업이 필요했다. 취재를 하며 알아보니 인테리어 가게가 남편이 현장 공사 작업을 진행하고 아내는 가게에서 상담과 회계 등을 맡는 경우가 많더라. 부부가 운영하는 인테리어 가게를 1주일간 따라다니며 공사 현장 잔심부름도 하고 가게 오픈 시간부터 함께하면서 상담도 지켜보곤 했다.

인테리어의 여러 공정 중에서도 도배 작업이 집중적으로 나오는데.
여러 작업 중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작업이다. 낡은 헌 벽지를 뜯어내는 모습에서는 무언가 울분이 느껴진다면, 새 벽지를 붙이는 과정은 마치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런 정서들이 관객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최무성 선배와 유빈 배우도 도배 학원에서 이틀 정도 일을 배웠는데, 의외로 유빈이가 더 잘하더라(웃음). 무성 선배가 서툴러 보일까 봐 걱정했는데 역시 연기를 잘하셔서 화면에서는 티가 안 났다(웃음).

인물들의 감정선에서 개인적으로 공감하거나 애정이 가는 장면이 있다면.
미숙(김여진)이 기현(성유빈)에게 빵을 건네는 장면이다. 편집하면서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아직은 어색하면서도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랄까.

영화는 어떤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고 마무리된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픈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내게 중요했던 건 확실한 희망이나 용서가 아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행동에 대해 ‘용서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보여주는 것은 섣부를 수 있다. <살아남은 아이>는 세 사람이 각자의 강에서 빠져 허우적거리며 시작하지만, 결국 서로의 노력으로 서로를 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용서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서로에게 조그만 위안이라도 주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바라보다

과학자를 꿈꾸던 공대생에서 뒤늦게 영화로 진로를 바꿨다는 점이 특이했다.
대학 시절까지 영화나 소설을 많이 본 편이 아니었다. 남들 다 보는 블록버스터 영화 정도? 그러다 우연히 접한 <택시 드라이버>가 계기가 됐다. 이상하게 계속 이 영화가 떠오르면서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기더라. 내가 정해둔 인생 경로는 일찍부터 확고한 편이었는데 갑자기 흔들린 거다. ‘사람’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와 공감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깨달음이 밀려왔고, 그걸 채우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다. 누군가는 이런 경우 심리학을 공부하듯이, 내겐 그 답이 영화였던 것 같다. 영화란 결국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예술이니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시절은 어땠나.
즐거웠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다. 남들보다 영화를 많이 본 것도 아니었고, 다른 예술 장르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다른 이들에겐 이미 준비된 것들을 뒤늦게 채워가는 셈이었으니까. 지금도 시나리오를 잘 쓰는 편은 아닌데, 당시에는 무엇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맞춤법 하나부터 쉽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하나씩 채워가는 과정의 굴곡이 있었던 것 같다.

늦깎이 영화학도였지만 첫 단편 영화 <물결이 일다>2004, <가희와 BH>2006를 통해 다양한 국내외 영화제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을 현실에서 발견할 때, 이야기로 만들고픈 욕구가 생기는 것 같다. 한예종 시절 자원 봉사를 하다 자폐 증세 자녀를 둔 어머니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전해지던 감정들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렇게 만든 첫 단편이 <물결이 일다>다. 요즘 활약하고 있는 이다윗 배우가 초등학생 때 출연한 작품인데, 이때의 인연으로 <살아남은 아이>에 은찬 역으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이미지

2006년의 단편 <가희와 BH> 이후 첫 장편 <살아남은 아이>가 완성되기까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 같다. 졸업 후 2년 동안 연출부 생활을 했는데 준비하던 작품이 몇 차례 엎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충무로 시스템이 잘 갖춰진 시절도 아니고 해서, 그런 과정들이 거듭되다 보니 이런저런 좌절감,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회의감이 들더라. 이후에 차라리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만들어보자는 결심이 생겼다. 한동안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 버티면서 내 글을 쓰려고 노력했던 시간이었다.

성남문화재단의 독립영화제작지원이 영화인들에게, 영화 제작에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지원이라는 지원은 다 도전해볼 수밖에 없다(웃음). 여러 영상위원회의 지원 사업도 있지만, 특정 도시에서 독립영화를 지원한다는 건 드문 사례다. 성남의 지원이 생긴 덕분에 많은 독립영화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제는 성남에 제작지원을 신청하는 자체가 독립영화인들에게 일상화된 과정일 정도로, 가뭄 속 단비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나 할까. 나 역시 성남의 지원이 없었다면 <살아남은 아이>를 어떻게 완성할 수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었다. 예산 외적인 측면에서도 큰 힘이 되었다. 어딘가의 제작지원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여러 심사위원들의 검증을 받아 통과된 시나리오’라는 의미라, 캐스팅이나 기타 과정에서 배우들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덕분에 이력서에 경력 한 줄이 더해진 것처럼, 프리 프러덕션 과정이 한층 든든했다.


"내게 중요했던 건
확실한 희망이나 용서가 아니다.
용서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서로에게 조그만 위안이라도 주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지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었다.
성유빈 배우와 함께 영화제에 다녀오셨는데,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었는지. 포럼 부문은 예술영화와 저예산 영화들을 소개하는 섹션이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1년 전부터 세계 각국을 돌아보며 영화를 선정하는데, 올해는 박기용 감독님의 <재회>와 홍상수 감독님의 <풀잎들>까지 세 작품이 상영되었다. 워낙 국제적인 명성의 영화제이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영화제 중에서도 대규모라 들었는데, 실제로 상영관도 400석, 600석의 큰 규모였다. 또 영화제 중심부 주변에서만 상영회를 진행하지 않고 더 많은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동쪽에서 한 번, 서쪽 한 번, 이런 식으로 큰 지역별로 번갈아 상영을 진행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6일 동안 상영회와 관객과의 대화를 네 차례씩 진행했는데, 매회 다양한 연령대의 많은 관객들이 상영관을 찾아와 부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현지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서울독립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까지 많은 수상을 했다. 지난 4월에는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최우수 데뷔작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고. 이런 수상이 실제적으로는 어떤 도움이 되는지 궁금하다.
독립영화의 첫 번째 목표는 ‘개봉’이다. 개봉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영화제를 통해 먼저 영화가 소개되고 관객 호평이 이어지면 배급사도 생각이 달라지고 개봉까지 이어지는 일이 많다. 수상 그 자체로도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발판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살아남은 아이>도 올 여름 개봉을 목표로 조율 중에 있다.

‘독립영화’라는 구분은 소재적인 측면일까, 아니면 제작 환경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까.
예산 규모에 따른 관습적인 분류도 있겠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내용인 것 같다. 상업영화에서 다루기 힘든 주제를 던질 수 있는 장르, 도전적으로 작업하고 싶은 영역이 가능한 장르 아닐까. 상업영화에서 다루지 않는 색다른 소재와 메시지를 담아내야 관객도 호기심을 갖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차기작 소식이 궁금하다.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살인범을 잡는 여성 형사의 이야기인데, 어떤 긴박함과 장르적 색채가 강한 추리물이라기보다는 형사의 감정과 정서에 집중하는 심리적인 면이 강한 내용이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신지.
좋은 영화는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았던 경험이 한 번쯤 있지 않나? 오래된 친구처럼, 혹은 거울처럼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는 영화, 누군가 두고두고 다시 찾아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 공감의 힘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세부정보

  • / 남소연, 성남문화재단 홍보미디어부 과장

    사진/ 김민한, studio A:part

  • / <아트뷰>의 모든 저작물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습니다. 게재된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성남문화재단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 <아트뷰>의 일부 기사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원 파일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남미디어센터 시민라디오제작단 최윤진 님의 목소리 기부와 편집으로 제작되는 음원은 성남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무료 다운로드가 가능합니다.

글쓴이
성남문화재단
자기소개
2004년 출범한 성남문화재단은 그동안 지역사회 속에서 펼치는 창의적 문화정책, 성남아트센터와 큐브미술관을 중심으로 선보이는 세계 정상의 예술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의 모델을 제시해 왔습니다. 누구나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을 즐기고 시민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도시, 바로 성남문화재단이 만들어갈 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