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성남문화재단

세상이라는 '얼굴'에 다가서는 법

영화감독 이강현

이 글은 성남문화재단의 격월간 문화예술 매거진〈아트뷰〉6+7월호의 본문 내용입니다.


영화 <얼굴들>의 구조는 독특하다. 네 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 흐름 속에 드러나는 것은 순간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이강현 감독은 스크린에 드러난 현재의 시점에서 이들의 얼굴을 규정짓는 대신, 조금씩 변화하게 될 삶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들은 여전히 낯선 얼굴들이지만, 그 생경함이야말로 저마다의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느린 걸음일지라도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얼굴인 것이다.


글 | 남소연 성남문화재단 홍보미디어부 과장



고등학교 행정실 직원 기선(박종환)은 졸업 앨범에 담길 학생들의 사진 속에서 우연히 축구부 진수(윤종석)의 얼굴을 발견한다. 어쩐지 진수에게 마음이 쓰이는 기선. 진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도움과 관심의 손길을 내밀지만, 기선의 노력은 원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회사를 그만둔 뒤 어머니의 낡은 식당을 리모델링할 계획을 품은 혜진(김새벽)은 주변 식당과 부동산, 동네 유동 인구까지 분석하며 애쓰지만 매번 냉랭한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다. 그리고 택배 기사 현수(백수장)는 이들의 일상 한편을 무심히 스쳐가며 자신만의 길을 향한다.


<파산의 기술>2006, <보라>2011로 이어지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자본과 노동, 사회와 시스템에 관한 관찰의 편린들을 기록했던 이강현 감독. 그는 신작 <얼굴들>을 통해 사소한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의 순간을 지켜본다. 2016년 성남문화재단의 독립영화제작지원작 세 번째 작업이자 첫 번째 극영화이기도 한 <얼굴들>은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상과 독불장군상,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상을 수상했다. ‘독불장군상’이라는 상의 의미대로, ‘누가 뭐라 하든 갈 길을 가는’ 그만의 시선으로 기록한 얼굴들의 표정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하신 작업인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문득 <얼굴들>이란 제목이 먼저 떠올랐다. 학교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일반적인 ‘학생’과는 좀 다른 주변부 어딘가의 아이에게 불현듯 관심을 쏟게 되는 것, 그러나 그 관계의 구축이 실패하는 것, 그 정도의 상태에서 시작했던 이야기다.


<얼굴들>의 영문명은 다. 일부러 뉘앙스의 차이를 두신 건지 궁금하다.

영문 타이틀은 <얼굴들>의 편집 후반부 작업이 마무리될 때쯤 지었다. 처음 <얼굴들>이라고 정했을 때와 다르게 영화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는 ‘가능한 얼굴들’이라는 뉘앙스가 더 마음에 와 닿더라. ‘가능한 ~이다’라는 문장에는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여기까지만 가능하다’고 한계를 만드는 소극적인 의미지만, 오히려 그렇게 인정하고 선언했을 때 갖게 되는 어떤 공세적인 힘도 느껴졌다. 그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극영화지만 관객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극영화의 내러티브와는 다르다. 네 명의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병렬적으로 나열되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기도 한다. 주인공 기선 외에는 다른 세 사람과 접점을 갖고 있는 인물도 없다.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시간 구성을 일부러 특이하게 해본다거나, 어느 지점에서 한번 비틀어본다거나 하는 장치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썼다. 인물들 간의 접점 역시 일부러 배제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고, 그냥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얼굴들>이라는 타이틀에서는 언뜻 각 인물들을 타이트하게 바라보는 느낌이 연상되지만, 실제 영화는 인물화가 아니라 멀리서 조망한 풍경화의 느낌이다. 멀리서 뒷모습만을 따라간다든가, 마치 배경의 일부처럼 녹아드는. 이전의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에서 보여준 관찰자의 시선이 이번 작업에서도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마 강하게 대비되거나 강조되는 무언가를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앞선 답과 비슷한데, 영화를 만들고 찍는 입장에서는 ‘이쯤에서 멈췄을 때 더 풍부해지는 어떤 느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안정감을 느끼는 화면의 사이즈나 구도 역시 있을 거다.


△ 영화 <얼굴들> 스틸 이미지


영화 초반부에서 기선은 앨범 업체 직원과 아이들의 졸업 사진을 살펴본다. 아이들이 실제보다 불량스러워 보인다는 기선의 말에 직원은 “동네 따라 애들 얼굴도 다 똑같다”고 대답한다. 어쩌면 이 대사에 영화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의 일부가 함축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앨범 업체 직원의 말은 사실 정말 폭력적인 얘기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진 그런 편견과 폭력적인 시선들이 그저 나쁘다고 얘기하기보다는, 그런 생각들이 자리 잡은 기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사람들에게는 같은 측면도, 다른 측면도 존재한다. ‘모두가 똑같다’는 말은 분명 옳은 얘기는 아니지만, 세상에 대한 어떤 보편적인 감정이나 시선은 있을 거다. 그 감정들이 내가 흥미로워하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청취율 높은 라디오 방송들의 사연들은 모두가 보편적인 이야기들만 나오지만, 그 보편성이 현실의 세세하고 다양한 결들을 모두 포괄하는 진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살이는 이런 거지’라고 뭉뚱그려 얘기할 수 있는 평균적인 감성도 분명 존재할 테고. 그런 양면적인 감정의 측면에 흥미를 느낀다.


사보 기자로 이직한 기선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클라이언트 ‘제3조정관’으로 인한 좌절을 겪는다. 제3조정관은 어떤 의미를 담은 인물일까? 일상 속에서 우리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는 어떤 시스템과 같은 존재인 것인가?

비슷하다. 기선을 좌지우지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사람들 삶의 희로애락 같은 감정을 관장하기도 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인간은 독립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서사와 희로애락을 가꾸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 부분들을 어쩌면 사회의 시스템, 혹은 체제가 대신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부분을 제3조정관이라는 역할로 표현해보려고 했다.


기선은 학교 행정실 직원에서 사보 기자로, 혜진은 회사원에서 식당 주인으로, 진수는 축구 선수에서 풋살 강사로 변모한다. 인물들의 삶은 변화하지만 영화는 그 변화의 일부 순간을 포착할 뿐, 어떤 결말이나 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거리에 선 기선과 그를 지켜보는 CCTV의 모습에서 마무리되는 모습도 특이했다.

예를 들면 혜진은 자신의 미션을 수행하며 하나의 흐름이 마감된 것이다. 물론 그 흐름이 끝났다고 해서 혜진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모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쭉 늘어진 삶의 타임라인에서 한 시기의 미션이 완수되었다는 것 정도가 혜진의 결말이다. 진수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기선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많은 관계들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만 막상 그 의욕과 달리 실패를 겪는, 또 그 실패 앞에서 혼란을 겪는 존재다.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맴돌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의 기선, 그런 모습을 포괄하며 바라보는 시스템의 존재가 있는 상태에서 끝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 영화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배우가 등장하는 첫 극영화 작업이다. 그동안 독립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던 배우들과 함께하셨는데, 어떤 점을 인상 깊게 보셔서 캐스팅하셨는지 궁금하다.

혜진 역을 연기한 김새벽 배우는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많이 보는 영화들, 극과 캐릭터가 뚜렷한 역할의 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편안하게 보이지만 내면에는 굉장히 다양한 감정과 결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굳이 ‘극화’된 무언가를 꾸미거나 설정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 감정이 드러난다. 기선 역의 박종환 배우는 감정이 항상 찰랑찰랑 차 있는 듯한 느낌인데 전형적인 캐릭터 연기와는 다르다. 눈빛만 봐도 느껴지는 감정선이 좋았다. 현수 역의 백수장 배우는 어떤 장면에 놓이든 자신만의 고유한 느낌을 빚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 특유의 능력이 다른 영화에서도 인상적으로 드러나 기억에 남았다. 진수 역의 윤종석 배우는 외모도 멋지지만 기본기가 굉장히 탄탄하다. 아직 젊은 배우고,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배우다. 얼마 전 종편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의 직장 동료로 등장해 인기가 부쩍 높아졌다(웃음).


기본적인 제작비 규모가 정말 빡빡했던 것 같다. 성남문화재단의 지원금이 더해졌다 해도 예산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 비용을 절감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셨는지.

그냥 포기를 많이 하면서 찍었다(웃음). 제작비는 계속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얼굴들> 작업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웃음)…. 인물이 많고 로케이션이 많고, 세트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장치들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규모의 경제가 불균형을 이룬 것 같다. 모든 상황이 여유롭게 착착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장소 헌팅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보조 출연자 한 분 섭외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극중 성남아트센터 갤러리 808 공간에서 찍은 장면이 있는데, 공간 제공은 물론 직원들이 기꺼이 보조 출연을 수락해주셔서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마다 좋은 영화의 기준은 분명 다르리라 본다.

다수의 감각, 다수의 선호도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의 기준에 못 미칠 수는 있을지언정,

적어도 스스로 생각할 때 영화의 본령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작업을 하고 싶다"



제작지원금의 집행 기한이라든가 여러 행정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사전 제작에 관한 지원금이다 보니 1년이라는 회계 연도에 맞춰 진행하기가 힘들긴 했다. 지원에 관한 기한을 두는 것은 당연한데, 현장 제작이라는 것이 초반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쉽진 않았다. 물론 행정적인 절차와 처리 문제로 인한 규정이겠지만, 그 부분만 좀 더 탄력적으로 조정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다른 기관들의 경우 기간에 대한 유예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기관마다 특성이 다르다는 점은 알지만 사례의 하나로 참고해주시면 어떨까 싶다.


독립영화란 누군가에게는 저예산 영화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상업영화의 하위 개념일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다른 가치’를 담아내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하신 적이 있다.

사람마다 좋은 영화의 기준은 분명 다르리라 본다. 다수의 감각, 다수의 선호도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의 기준에 못 미칠 수는 있을지언정, 적어도 스스로 생각할 때 영화의 본령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작업을 하고 싶다.


차기작 계획은?

현대 과학 기술의 조건에서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영화를 구상 중인데, 장르를 명확하게 정의내리기는 좀 어렵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극영화 안에서도 드라마, 이런 식의 일반적인 구분에는 국한되지 않을 영화다. 현대 사회의 위치 정보 서비스와 관련된 여러 요소들, 4차 산업 혁명이라든가 인공 지능, 사물 인터넷, 모바일 기반 기술… 이렇게 삶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대 테크놀로지 속에서 인간의 접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성남문화재단〈아트뷰〉 6+7월호 전문보기



세부정보

  • / 남소연, 성남문화재단 홍보미디어부 과장

    사진/ 김도형, studio A: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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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2004년 출범한 성남문화재단은 그동안 지역사회 속에서 펼치는 창의적 문화정책, 성남아트센터와 큐브미술관을 중심으로 선보이는 세계 정상의 예술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의 모델을 제시해 왔습니다. 누구나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을 즐기고 시민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도시, 바로 성남문화재단이 만들어갈 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