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류선하 선생님이 들려주는 옛 교육 현장

경기학광장Vol.2 _ People & Life

< 류선하 선생님이 들려주는 옛 교육 현장 >


- 경기학광장Vol.2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옛 교육의 현장과 수원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 류선하 선생님


“그 시절 학생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참 순수했다. 여러 학교의 학생주임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 원처럼 둥글게 보려는 노력을 했는데, 외형적인 모습만으로 단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쉽게 학교의 담을 월담한다고 해서 다 나쁜 학생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실제 한 학생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본 뒤 모른 척 넘어 가준 적이 있었다. 그러면 학생 역시 모르는 것 같지만, 선생님이 알고도 모른 척 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게 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의 행동 변화가 있었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그 시절 순수했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교사의 삶은 내 인생의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세계사의 시각으로 보면 한국의 독특한 점은 단시간에 걸쳐 나타난 압축성장이 두드러진다. 이는 단순히 경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정치와 사회,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나타난 특징으로,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에서 수백 년에 걸쳐 나타난 보완이 된 여러 제도를 우리는 불과 반세기 만에 적용하다보니, 여기에서 파생하는 여러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세기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조선(=대한제국)의 멸망,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한국전쟁, 군부독재와 민주주의, 산업의 발전과 경제 호황 등이 압축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해당 시대를 살았던 분 들이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여기 한 분의 선생님을 소개하고자 한다. 류선하 선생님은 지난 1967년부터 교직에 첫발을 내딛은 이래 2005년 관산중 학교 교장으로 퇴직하셨다. 원래 경기도민은 아니었지만, 우리 역사의 역동적인 시대 분위기 속에 경기도가 제2의 고향이 된 류선하 선생님의 이야기를 통해 선생님이 경험했던 교육 현장과 옛 수원의 모습을 주목해보자!


경기도로 오다 : 교직의 삶을 선택하기까지


류선하 선생님은 1942년 경상북도 문경 출생으로, 고등학교까지 문경에서 마친 토박이였다. 이러한 문경을 처음 떠나게 된 건 한국전쟁 때로,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선생님은 북한의 기습 침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경에 있던 선생님의 집 역시 낙동강 전선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당시의 모습에 대해 들려줄 것을 부탁하자 “아휴~ 말도 마! 길 한편에 죽은 사람들 시신이 널부러져 있는데, 정말 참혹했지”라는 말과 함께 “당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귀해서 짠지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고 증언했다. 실제 당시 피난을 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군인의 시신은 치워준 반면, 인민군 시신은 그대로 방치했다는 증언이 있을 만큼 참혹한 환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한국전쟁이 끝난 뒤 선생님은 다시 문경으로 돌아와 학업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이후 대학교 진학으로 문경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되는데, 본래 미술에 뜻에 있어, 미술을 전공하기를 희망했지만 부모님의 반대 속에 뜻을 접어야 했다. 그렇게 학업을 마친 후인 1965년 경기도 수원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수원으로 온 이유에 대해 물어보자 일자리를 찾아 올라오게 되었다고 했는데, ‘일자리’는 단순히 단어가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단어다. 예나 지금이나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오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인구의 변화는 추석이나 설날처럼 명절 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긴 행렬 속에 담긴 시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류선하 선생님이 수원에 왔을 때 처음에는 농촌진흥청에서 1년간 근무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 1년 뒤인 1966년부터 당시 화성군 비봉면에 소재한 비봉농고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된다. 이직의 배경에 대해 물어보니, “부모님이 반대하긴 했지만, 미술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과감하게 교사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당시 선생님이 맡았던 과목은 <농업>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농촌진흥청의 근무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선생님이 교사로서 첫 발을 내딛을 당시만 해도 교원의 부족은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고 한다. 당시 교실의 풍경을 이야기해달라고 했을 때 가장 인상적인 건 학생의 수였다. 지금은 학생수가 30~35명인데 비해, 당시에는 70명이나 되는 등 학생들의 수가 많았다. 당시 인구학적으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학령 인구 취학률이 증가할 때였기에 이같은 현상이 나타났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교원의 수가 부족해졌던 것이다.


지금이야 국·공립학교의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학부에서 교직 과정을 이수한 뒤 임용고시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당시 교원 양성과정이 채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늘어난 학생의 수를 감당하지 못하자 교육 당국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임시교원 양성소를 개설, 이곳을 수료하거나 일반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도 교원 양성의 기회를 부여했다. 선생님의 경우도 임시교원 양성소의 교육을 수료한 뒤 1984년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미술교육 전공)을 졸업, 교원 자격을 취득한 경우였다. 이처럼 비봉농고에서 시작한 교사로서의 행적은 91년을 기준으로 그 전까지는 사립, 이후로는 공립학교에서 근무했다. 공립과 사립을 모두 경험하셨기에 둘의 차이점이 뭔지 물어봤는데, 선생님이 생각하는 가장 큰 차이는 사립에 비해 공립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교장까지 올라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는 점이다.


교육 현장의 이야기 : 순수했던 학생들과 교육에 대한 열망


옛 교육의 현장과 수원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 류선하 선생님


선생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당시의 교육 현장의 분위기였다. 이에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일 뿐,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 “당시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교육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이야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 되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중학교까지도 의무교육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공납금을 내야 했는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공납금을 못내 학교를 못 다닌 학생들도 있는가 하면, 공납금을 못 낼 경우 돈을 가지고 오라고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공부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 부모님들의 인식은 자기 자식이 공부를 잘해 우리 부모 세대보다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고 하는데,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해보면 이러한 부모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때문에 학교 선생님과 부모님, 학생들 간의 신뢰와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선생님께 “당시에도 과외 같은 것이 있었나요?”라고 물어보니, 우선 도시와 시골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시골의 경우 학교 교육 이외에 마땅한 교육의 수단이 없었다. 때문에 시골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 중 일부는 인근의 수원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즉 이 시기의 경우 학교 공부도 간신히 하던 시절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도시의 경우는 소위 잘 사는 학군 지역의 경우 부모들의 교육열과 재력이 있어 시골에서 경험했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했는데, 교육 여건의 차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교육 현장 역시 열악했는데, 선생님의 수가 부족해 상치(相馳)교사가 대신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상치교사는 자신의 전공과목 이외의 관련 없는 과목을 가르치는 경우로, 가령 미술 전문인 선생님이 생물을 가르치는 형태의 전공 과목 불일치 사례도 나타났다고 한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 중 교련이 있는데, 80년대까지 학교마다 있던 교련 과목이 폐지되면서, 교련 교사들에 대한 재교육을 거쳐 체육이나 사회 등의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작품 중 ‘한국의 멋’ 성년의 날을 그리고 있으며, 이외에도 여러 학교 교표 및 로고디자인 등을 제작 했다.


문득 우리가 실업계라고 부르는 공고, 상고, 농고에 대한 인식이 그 때는 어떠했는지를 물어봤다. “당시만 해도 공고와 상고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도 많았다”고 말하며,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이 어렵거나, 먼저 취업을 해 돈을 벌어야 하는 학생들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곤 했다고 한다. 지금과 달리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기술 장려의 시대였기에, 이러한 실업계 고등학교에 대한 인식은 과거와 현재가 판이하게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새마을운동 당시 학교에서는 어떤 활동들이 있었는지 질문 해보았다. 이에 “새마을운동 때는 학생들을 데리고 농촌 일손 돕기를 했다”고 말하며, 퇴비정산이나 모심기 등의 활동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선생님께 당시 학생들의 학업 환경이나 모습 등에 대해 물어보니, 선생님은 “돌아보니 당시 학생들의 모습은 참 순수했 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기에 교사로서의 삶이 참 행복했다고 말하는 류선하 선생님, 하지만 당시만 해도 선생님과 학생의 사제 관계는 서로 간 신뢰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러한 신뢰가 사라지는 모습에 안타까워했다.


특히 학생들의 지도에 대한 선생님 나름의 철학이 있는데, “학생들의 문제는 학교 안에서” 해결해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90년대 이후 학교 교육에 대한 부적응 학생의 증가로 인한 사회 문제가 되던 시기 였고, 이러한 때에 선생님은 학생주임 및 미술반 활성화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실제 선생님은 “그림을 사랑하듯 학생들을 대합니다. 화가가 작품에 대한 사랑과 고뇌, 노력이 없으면 그림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학생들도 교사의 사랑과 관심이 없으면 올바른 인격체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학생 지도 철학을 이어갔고, 이에 1996년 ‘부적응 학생 지도 및 미술반 활성화’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수원박물관 내 재현된 화춘옥의 옛 모습, 갈비탕과 설렁탕이 인기 메뉴였다고 하며, 크로바 백화점을 나올 때면 자주 들러던 장소였다고 한다.


선생님이 기억하는 수원의 모습 :

크로바 백화점에서의 미술 실기대회


류선하 선생님은 1966년 수원에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수원에 거주하고 있다. 이에 선생님의 기억 속 수원의 모습에 대해 설명해줄 것을 부탁드렸다. 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소 중 ‘크로바 백화점’이 있다. 지금의 영동시장 인근에 있었다고 하는 이 백화점은 미술과 관련 당시 학생들의 사생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주로 선생님은 학생들을 인솔해 크로바 백화점을 갔다고 하는데, 사생대회의 경우 주로 팔달산에 올라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수원 화성의 성벽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지동시장 쪽으로 미나리가 심어져 있어 속칭 ‘미나리깡’으로 불렸다고 하며, 이곳을 지날 때면 화춘옥(華春屋)에 들렀다고 하는데, 이곳의 갈비탕과 설렁탕이 인기 메뉴였다고 한다.

이처럼 화춘옥이 유명세를 떨친 건 수원에 우시장이 있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지금도 수원왕갈비는 꽤 유명한 음식으로 손꼽힌다. 또한 선생님의 기억 속 예전에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구)수원시청과 구)수원문화원이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수원시여성가족회관 자리다. 현재 두 곳 모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한편 이때만 해도 화성행궁의 자리에는 경기도립의료원이 있어 현재 복원된 화성행궁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고 하며, 행궁광장에는 우체국 건물이 있는 등 수원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지금의 행궁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화가 나혜석의 생가터 등 선생님의 기억 속 수원의 옛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한편 교직에서 은퇴한 뒤 류선하 선생님은 화가, 디자이너로서 현재 ▲경기미술작가회 회장 ▲ 수원미술협회 고문 ▲한국미술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수원시 문화상(미술분야,2013)과 수원시 예술인대상(미술분야, 2019)를 수상, 현 시각미술계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본래 경기도민은 아니었지만, 역동적인 시대의 흐름 속에 경기도, 그리고 수원이 제2의 고향이 된 경우로, 교직에 헌신했던 선생님의 교육 현장의 이야기와 수원의 옛 모습을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은 많은 이들에게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이야기로 기억이 될 것이다.



글 김희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의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더 많은 경기학광장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바로가기]



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