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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권세의 온상이었던 남양주 석실마을

경기학광장Vol.4 _ Village & History

< 안동김씨 권세의 온상이었던 남양주 석실마을 >


- 경기학광장Vol.4 _ Village & Histor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남양주시에는 석실마을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두 군데가 있다. 한 곳은 수석동에 있는 석실마을이고, 다른 한 곳은 와부읍 덕소리에 있는 석실마을이다. 이 두 마을은 단순히 이름뿐만 아니라 안동김씨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데서도 공통점이 있다. 수석동의 석실마을은 안동김씨인 김상용과 김상헌을 배향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석실서원이 있었던 곳이고, 덕소리의 석실마을은 안동김씨의 세장지이자 세거지였던 곳이다. 이 중 오리지널 석실마을은 수석동에 있던 마을이었다고 판단된다. 덕소리의 경우 원래 적실마을로 불리다가 석실마을로 명칭이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석실마을의 원조를 따지면서 마을의 명칭 변화를 논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두 석실마을의 변화 과정 속에는 안동김씨의 흥망성쇠가 집약되어 있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발생지였던 남양주의 역사를 이해하는데도 적지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석동의 석실마을


덕소리의 석실마을

덕소리 석실마을에 안동김씨가 세거하게 된 사연

안동김씨가 남양주시에 터전을 잡게 된 것은 조선 중기의 일이다. 김번(1479∼1544)의 묘가 덕소리 석실마을에 자리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니 470여 년이 훌쩍 넘어간다. 비록 사후이지만 김번이 이 마을의 입향조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안동김씨가 들어오기 전 이곳은 이미 남양홍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한다. 그러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케이스라 하겠는데, 두 가문 모두 조선시대의 문벌집안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안동김씨가 남양홍씨를 밀어내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의 관심이 지대했던 모양이다. 이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지금껏 전해지는 것이다.

안동김씨가 입향하기 전 덕소리 석실마을은 남양홍씨의 세거지로 그 일대 산이 모두 남양홍씨 문중의 선산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거주하던 남양홍씨 집안에서 여식을 안동김씨 김번에게 출가시키며 두 가문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그러던 중 안동김씨 집안의 며느리가 된 홍씨부인은 친정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친정마을로 돌아왔다. 남양홍씨가에서는 지관을 불러서 홍씨부인의 아버지를 안장할 광중(壙中)을 봐 두었는데 그 자리가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 즉 옥병에 물을 담은 형국으로 명당자리였다. 이 사실을 안 홍씨 부인은 밤새 물을 길어다 광중에 부었고, 물이 차 있는 바람에 결국 홍씨부인의 아버지 시신은 안장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3년이 지나자 홍씨부인은 이미 죽은 남편 김번의 시신을 그 옥호저수형의 터에 이장시켰다. 친정아버지의 묏자리를 남편의 묏자리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이 묘로 인하여 안동김씨 일가는 덕소리 석실마을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후 고관대작과 문장가들이 수없이 배출되었다 한다.

하지만 김번의 묘가 덕소리 석실마을에 자리잡게 된 것은 세조의 국사이며 김번의 큰아버지였던 등곡 학조대사가 남양홍씨의 땅에 김번의 묏자리를 잡아준 데서 비롯된 것일 뿐이니 이 전설은 사 실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친정의 명당터를 술수를 써서 시댁의 명당터로 바꿔치기했다는 이러한 출가외인 유형의 풍수전설은 손진태의 <조선민담집2>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전국적으로 유포된 풍수전설의 일종이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덕소리 석실마을에 안동김씨가 들어오기 전 남양홍씨가 세거하고 있었고, 김번의 정부인이 남양홍씨이며, 김번의 묘가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안동김씨와 남양홍씨의 운명이 갈라졌다는 것은 이 전설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사실이었기에 호사가들에 의해 널리 유포되었던 듯하다.

조선의 팔대명당 중 하나인 김번의 묘

덕소리 석실마을은 이후로 안동김씨의 세거지이자 세장지(世葬地)가 된다. 문제가 되는 김번의 묘자리는 조선의 팔대명당으로 손꼽히며 지금도 풍수가들이 자주 찾는 순례코스 중 하나이다. 과연 옥호저수형 묘자리 덕분인지는 몰라도 김번의 후손 중에는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 다수 배출된 것은 분명하다. 충절과 대의로 명성을 얻은 김상용과 김상헌을 비롯하여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을 거쳐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초가 되는 김조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막을 내린지 1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풍수가들 사이에서 왜 이곳의 지세가 다했는지에 대한 설왕설래가 그치지 않는다.
현재 덕소리 석실마을에는 안동김씨가 세 가구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 중 두 가구가 선원 김상용의 종손가와 청음 김상헌의 종손가로 마을의 안동김씨 분산(墳山)을 돌보고 있다. 청음의 17대손인 김주현 씨에 의하면 석실마을 대부분의 전답이 안동김씨의 위토(位土)였지만 현재는 거의 처분하고 대신 건물을 하나 매입하여 거기서 들어오는 임대료로 묘역의 관리와 시제의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매년 시제 때가 되면 각처에 흩어져 있는 종중 분들이 40여 명 정도 참석한다고 한다.


덕소리 석실마을 안동김씨 서윤공파 묘역. 왼쪽 호리병 모양의 터에 있는 묘가 김번의 묘이고, 오른쪽 묘역 중 나무 옆에 자리잡은 묘가 김상헌의 묘이다.

위세 등등했던 안동김씨와 득수리고개

김조순 이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60여 년간 이어진다. 흔히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의 권세는 덕소리 석실마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 내주는 일화가 ‘득수리고개’에 얽힌 이야기다.
덕소리 석실마을과 율석마을 사이에 있던 이 고개는 한양으로 오가는 길목이어서 지나가는 행인이 많았다. 이곳 인근에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경기도 동부와 강원도 지역의 역마를 관할하는 평구역이 있었으니, 주도로는 아니었다 해도 통행량이 빈번한 곳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곳에 살던 안동김씨 양반들은 길거리에서 나는 소음을 몹시 싫어했던 모양이다. 행인들이야 이 부근을 지날 때 숨을 죽이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수레의 경우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곳 양반들은 마을 앞에 있는 고개로 수레가 지나갈 때는 아예 수레를 들고 지나가게 하였다. 그래서 이 고개 이름이 '득수리고개'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득수리고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실마을 입구에서 율석리로 넘어가는 도로

수석동에 있었던 석실서원

수석동의 석실마을 역시 안동김씨 세력의 온상이었다. 이 마을은 안동김씨의 세거지는 아니고 김번의 증손이었던 김상용과 김상헌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석실서원이 있던 곳이다. 1656년(효종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1663년(현종 4)에 ‘석실(石室)’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석실이라는 이름이 사액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마을이 석실로 불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김상헌의 호 중에는 석실산인이라는 호가 있으므로 여기서 따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호는 김상헌이 양주 석실에 물러나 있을 때 지은 것이라 하니, 이 석실이 바로 수석동의 석실마을이며, 이곳에 사우를 세웠기 때문에 석실서원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안동김씨를 주축으로 하는 서인 노론계의 온상이 되었던 석실서원은 타도 안동김씨를 꿈꾸던 흥선대원군에게는 눈엣가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석실서원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땅에 묻혔으며 서원터는 폐허화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이 폐허화된 서원터에 조선 초기의 문신인 조말생(1370~1447)의 묘가 옮겨진다. 원래 그의 묘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었으나 1900년 금곡에 홍릉의 산릉공사가 시작되면서 석실서원 터로 이전되었다. 홍릉은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능이 었는데, 터의 불길론이 주장되면서 천장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이 와중에 덕소리 적실마을의 명칭이 석실마을로 변경된 것으로 판단된다.


▲ 수석동 석실마을의 석실서원지 표석                      덕소리 석실마을로 옮겨진 석실서원묘정비

적실마을이 석실마을이 된 사연

덕소리의 적실마을이 석실마을로 명칭이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350여 년 전 김상헌에 의해 이 마을이 도적의 소굴을 의미하는 적실(賊室)로 오해할 염려가 있어 석실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도 하고, 수석동에 있던 ‘석실서원묘정비’가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 석실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 것이다.
구전이 아닌 문헌기록을 통해 보았을 때는 후자가 맞는 말이다. 1912년에 간행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은 구한말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추정되는데, 수석동 석실마을은 양주군 미음면 석실리(石室里)로, 덕소리의 석실마을은 양주군 와공면 적실리(赤室里)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의 상황을 정리한 1917년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따르면 미금면의 석실리·수변리·석도리의 각 일부가 미금면 수석리로 통합되었고, 와공면의 덕소리·석실리·월곡리와 금촌면 4패리 각 일부가 와부면 덕소리로 통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덕소리 석실마을은 구한말까지 적실마을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전후한 시기에 석실마을로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는 1900년 수석동 석실마을 에 조말생의 묘역이 들어서면서 그 마을이 더 이상 안동김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곳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안동 김씨의 후손들이 석실서원의 전통을 이어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을이름을 석실로 고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석실서원터에 쓸쓸히 남아 있던 ‘석실서원묘정비’를 이곳에 옮겨온 것으로도 확인된다.

두 석실마을에 남아 있는 안동김씨의 자취

흥선대원군의 집정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서원철폐령을 통해 석실서원만 훼철된 것이 아니라 덕소리의 안동김씨 세거지도 점차 위세를 잃게 된 것이다.
현재 안동김씨의 위상이 깃들어 있던 두 석실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을 정도로 변해 있다. 현재 수석동 석실마을의 서원터에는 양주조씨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그 입구 옆에 있는 수풀에 석실서원지표석이 숨겨진 듯 세워져 있을 뿐이다. 덕소리 석실마을은 더 이상 집성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안동김씨의 후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뜬 자리로 공장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안동김씨의 자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석실마을이라는 이름이 존재하는 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남양주 역사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 김상헌의 묘역에서 바라본 현재 금곡동의 석실마을

글 김준기

동국대학교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대학원에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에 근무하며 마을조사를 다니면서 살아있는 민속현상과 그 안에 담겨있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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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4 _ 2020 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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