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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한남정맥 산행 안성 칠장산에서 가현치까지

경기학광장Vol.5 _ Trip & Healing

< 한남정맥 산행 안성 칠장산에서 가현치까지 >


- 경기학광장Vol.5 _ Trip & Healing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지는 한남정맥 개념도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지만


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는 서북쪽으로 끊어지지 않고 쉼 없이 달려 안성시 죽산면과 삼죽면, 그리고 금광면 경계에서 안성 칠장산(492.4m)과 만난다. 이곳에서 한 줄기는 남-남서쪽으로 칠현산(516.2m) - 덕성산(520m) - 서운산(547.4m)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으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가 된다. 다른 한 줄기는 북서쪽으로 국사봉(438m) - 무너미고개 - 함박산 - 학고개 - 부아산 - 메주고개 - 할미산성 - 광교산 - 수리산 - 소래산 - 계양산 - 것고개 -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으로, 한강이남 경기도 지역을 서부 해안지역과 동부 내륙지역으로 나눈다.

산길과 함께 물길은 한남정맥 서쪽으로 안성천과 진위천 그리고 여기서 갈라져 나온 황구지천과 오산천이 정맥과 나란히 진행을 하고, 동쪽으로는 남한강 수계에 속하는 복하천과 청미천 그리고 여기서 갈라진 수많은 지류들이 흐르고 있다. 동시에 이들 산과 물길 사이로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 대를 이어 땅을 가꾸고, 살아가며 ‘땅의 기억’을 기록·전승하고 있다.

족보 형태로 산 이름을 나열한 『산경표』는 비록 표의 형식이지만, 산줄기를 통해 동시에 물줄기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강 물줄기의 북쪽은 한북정맥이, 남쪽은 한남정맥이 지나고 있어, 한북정맥, 한남정맥, 한남금북정맥 그리고 백두대간을 서로 이어보면 한강을 위시한 안성천 유역의 분수계(分水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산줄기는 지역과 지역을 나누고, 물줄기는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물줄기를 따라 각 지역의 물자와 사람들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지역 발전과 문화의 교류도 함께 이루어졌다.



산경표(출처: 한민족 대백과 사전)


산길을 걸으며 ‘사람과 길’을 생각한다.


(1) 첫 번째 여정

오랜만에 꾸려보는 배낭. 예전같이 손과 마음이 자연스럽지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배낭을 꾸리고 펼치고 했던 시간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언 10여년이 흘러갔다. 그러니 모든 것이 서툴고 낯설다. 구석에 틀어 박혀 있던 장비를 꺼내는 것도 여간 성가시지 않다. 아무튼 산행에 필요한 장비들을 챙겨 배낭에 쑤셔 박듯 집어넣고 길을 나선다. 4월의 아침은 쌀쌀하면서도 포근하다. 산행을 하기에 더 없이 좋은 하루일 것 같다. 집(수원)을 나서 영동고속도로에 이어 호법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중부고속도로는 청주를 기점으로 하남까지 연결되는 도로로 1987년 12월에 개통되었다.


도도로키 히로시, <신라 북요통 복원 서설> 『아시아리뷰』 제8권 제2호, 2019, pp,157.


통일신라시대 육상교통로로 5통이 있었다고 한다. 동해통(東海通), 해남통(海南通), 염지통(鹽池通), 북요통(北傜通), 북해통(北海通)으로 이 중 염지통은 신라 왕경(지금의 경주)에서 백제의 옛 영역에 이르는 교통망으로 명칭과 같이 풍부한 소금자원을 가진 서해로 연결되었는데, 서해연안에서 생산된 소금은 이 길을 통해 왕경으로 운반되어 경주 서쪽 경계에 있는 서형산성 내 鹽庫(소금창고)에 보관되었다고 한다(『삼국사기』 권10, 애장왕 10년).


이 염지통은 추풍령을 넘어 청주, 진천을 거쳐 죽산(현 안성시 죽산면)을 지나 남양만 당은포로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재를 넘어 한주(지금의 서울지역)로 연결되는 북요통과 함께 신라의 한강 유역 경영과 대당외교를 위하여 정치·외교·군사·경제적 측면에서 무척이나 중요시 한 도로였다. 북요통은 지금의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이용하고 있는 도로는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대부분 그 형태와 기능이 조금 바뀌었을 뿐 아주 오랜 기간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들을 참고로 만든 것들이 많다.

차는 어느새 중부고속도로 일죽 나들목을 빠져나와 산행 들머리 안성 칠현산 칠장사 주차장에 섰다. 휑하다. 이제부터 나와 동고동락을 함께 할 배낭을 짊어지고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칠장사는 고려 문종 때 혜소 국사 정현(속성(俗姓)은 안성 이씨)이 입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국사(國師)의 시호를 받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혜소국사가 생존하고 있을 때 가장 번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안성에는 칠장사 말고도 굴암사, 석남사, 청룡사 등 유명한 고찰이 있는데 유독 칠장사와 관련하여 궁예, 혜소국사, 대각국사, 나옹대사, 가등청정, 임꺽정, 인목대비, 어사 박문수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들 중 어사 박문수의 과거 급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칠장사 나한전은 학문을 도와주는 나한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옛날에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갈 때면 이곳에 들러 나한전에 조청을 바치고 가면 과거에 급제하는 경우가 많아 시험보러 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곳을 들러 가곤 했다. 병천에 살던 박문수도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그의 어머니가 조청으로 만든 유과를 칠장사의 나한전에 바치고 가라 하여 어린 박문수는 그렇게 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시험 시제가 그대로 나와 과거에 급제하였다. 박문수는 돌아올 때도 하숙집에 부탁하여 과자를 만들어 다시 이곳에 갔다 바치고 갔다 하는데, 현재도 이 나한전에는 시험 합격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조청이나 과자 공양을 하고 있다”


봄빛이 완연한 칠장사 경내. 대웅전 오른쪽 2기의 석불입상은 봉업사지에서 옮겨다 놓은 것이다. 뒤로 보이는 산줄기가 한남정맥이다.


어릴 적 궁예가 활쏘는 모습을 그린 벽화



이처럼 칠장사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궁예와 임꺽정 그리고 과거 급제의 꿈을 안고 이곳을 지나간 박문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꿈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 이곳을 찾는 것을 보면 이곳이 기돗발이 잘 먹히는 곳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지금은 잘 포장된 도로가 있어 접근하기가 수월하지만 예전에는 내륙지방의 가장 은밀한 곳으로 사방 산으로 둘러싸여 접근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고, 심지어 고려왕조실록도 난을 피해 이곳에 9년간 보관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맥은 사찰 뒤쪽으로 지나간다. 정맥 서쪽으로는 경기도 안성, 동쪽으로는 당시 충청도 지역이었던 이곳으로 도적들이 도망 와 숨으면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절 주변이나 아래쪽에는 도적들이 떼를 지어 살아 사찰 아래 마을 이름도 ‘도적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면 대웅전 왼쪽 명부전 외벽에 궁예와 임꺽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명부전 뒤편에 ‘궁지(弓地)’라는 곳이 있는데, 궁예가 활 쏘는 연습을 한 곳으로 전해지며, 활을 무척 잘 쏘아 여기에서 궁예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져 온다. 벽화에도 어린 궁예가 활 쏘는 모습과 함께 수련을 하는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궁예와 관련한 설화는 주로 철원과 포천지역에 집중, 발견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이곳 죽주지역(지금의 안성지역)에도 궁예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궁예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곳도 이곳이고, 훗날 비뢰성 전투에서 양길의 군대를 대파한 곳도 이 지역 근처 기솔리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짧은 시간 경내를 둘러보고, 주차장 옆으로 난 사뭇 가파른 길로 접어든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호흡이 장난이 아니다. 호흡만 장난이 아닌가? 몸도 장난이 아니다. 당연하겠지 평소 숨쉬기 운동만 열심이었으니… 역시 몸은 정직하다. 등산로 양 옆으로 산죽들이 키 높이보다 웃자라 있다.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요란하게 내달리는 멧돼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치 이 산의 주인이 누구인가 확인하려는 듯. 가쁜 호흡이 턱 밑까지 찰 때 능선 삼거리에 닿았다. 많은 표지기가 다음 갈 길을 안내해 준다. 저마다 종주의 사연을 간직하며 불어오는 바람에 기지개를 핀다.

여기부터 정맥은 관해봉(458m)-도덕산(366m)-녹배(또는 늑배)고개(207m)-38번 국도-삼죽면사무소까지 북쪽으로 내달린다. 능선을 따라 지루한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겨우내 켜켜이 쌓인 낙엽들 때문에 내리막 구간에서는 발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봄 가뭄이 심한 탓일까? 내딛는 발걸음 마다 흙먼지가 일어난다. “비가 좀 와야 할 텐데” 하며 혼자 구시렁거려 본다. 능선 양 옆으로 잡목이 무성하게 자라 있고, 옅은 뿌연 먼지로 인해 조망은 시원하지 않다. 도덕산에서 삼죽면 소재지 구간까지 정맥은 한껏 몸을 낮추어 지역과 지역을 나누는 것보다 연결할 기회를 우리 인간들에게 준다.



국사봉 남쪽 기솔리 계곡 부근 개념도



능선 삼거리. 이정표는 언제나 반갑다



칠장산 정상석과 표지기가 바람에 기지개를 펴고 있다. 정상 삼각점은 다음 봉우리에 있다.


‘내’가 ‘너’를 만나 ‘우리’가 되듯이


도덕산과 삼죽면사무소 사이의 사장골로 38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38번 국도 남쪽 아래로 예전에 안성, 죽산 그리고 장호원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한 녹배(또는 늑베, 늑배)고개가 있다.

죽산면 장능리에서 삼죽면 진촌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산길을 걷다보면 고개는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준다. 고개에 이르면 사람을 만나고 물자를 보충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반면 다시 고도를 높여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녹배고개는 지금은 38번 국도로 인해 그 기능 대부분을 잃어버려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도로를 건너 삼죽면사무소를 끼고 덕산저수지를 향해 가다보면 삼죽과 죽산의 경계가 되는 ‘두둘기(두들기)고개’와 두둘기(두들기) 마을 그리고 지운이 마을이 나오는데, 지운이 마을은 이를 임계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남한강 상류, 서쪽으로는 안성천이 발원되고 있어 유명한 곳이다. 두둘기 마을은 이곳이 두덕처럼 높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형적 특성 외에도 양성이나 안성에서 체포된 죄인들을 죽산에 있는 감영으로 호송해야 하는데, 죄인들은 호송 중 이 고개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개를 넘으면 감옥에 갇히거나 혹독한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고개를 잘 넘으려 하지 않고 두들기(두둘기)며 지나갔다고 하여 두둘기(두들기)고개라 하였다고 한다. 또 죄인의 가족들은 여기까지 따라와 헤어지면서 땅을 두드리며 통곡하기도 하여 두들기 고개라고 했다고도 하고, 여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므로 두길기라 했다는데서 연유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이 지역의 토질이 황토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짚신을 신고 다닐 때면 흙이 들어붙어 이 고개에 올라와 쉬면서 신을 벗어 두들겨 털었다 하여 두들기 고개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시집 간 새색시가 첫아들을 낳아야 흙이 떨어졌다’고 말할 정도로 이곳에는 진흙이 많았다고 한다.

덕산저수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밭태종(발태종)마을로 접어든다. 저수지 바로 앞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뒤 뒷산(269.4m)을 지나 턱골고개(305m)가 나오는데, 이 고개는 삼죽면 기솔리와 배태리 사이의 고개이다. 탄력 받은 김에 한숨에 국사봉(445m)에 오른다.



원 안은 두들기 마을과 고개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녹배고개, 죽산면 장능리와 삼죽면 진촌리를 이어준다 왼쪽에 서 있는 전신주를 끼고 정맥은 다시 이어진다.


국사봉 남쪽 아래에는 국사암과 쌍미륵사가 있다. 두 곳 모두 ‘궁예미륵’이라 불리어지는 석불이 세워져 있다. 향토유적 제42호로 지정된 국사암 석조삼존불입상이 있고, 남쪽으로 4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2기의 기솔리 석불입상이 있다. 비록 두 곳 모두 ‘궁예미륵’으로 불리고 있지만, 국사암 석조삼존불입상은 그 양식에 있어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으로 알려져 있어 아마도 미륵의 환생을 바라는 민중들의 바램이 투영된 결과라 생각된다. 하지만 쌍미륵사에 위치한 2기의 석불입상은 약 10m의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는데,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 석불은 ‘남미륵’, 왼쪽의 석불은 ‘여미륵’으로 불려진다.



두들기 고개로 추정되는 도로의 현재의 모습



국사봉 전망대 나뭇가지에 걸린 선답자들의 표지기. 잠시 쉬어가라 손짓한다



기솔리 쌍미륵사 석불입상. 완쪽이 ‘여미륵’ 오른쪽이 ‘남미륵’


양식적 특성으로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궁예가 이곳에서 활약을 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남미륵’으로 불리는 석불의 윗입술은 당시 부처의 입술 모양에서는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입을 벌린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런 파격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기솔리는 현재의 죽산면을 중심으로 한 죽주지역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궁예가 1년 넘게 이곳에서 머물며 국사봉에서 무예를 연마하며 쌍미륵사에서 설법을 하였는데, 이 때 설법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이 곳에 미륵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칠장사를 포함한 안성 곳곳에서 발견되는 궁예에 대한 전설은 대부분 호의적이다. 금빛가사를 입고 자칭 미륵불이라 칭하며, 관심법을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는 드라마 속 궁예의 모습은 적어도 이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역사 서술의 헤게모니를 누가 쥐고 있느냐가 다만 문제일 뿐 아무튼 이곳에서 전해지는 궁예와 관련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 가현치의 모습



다음 산행의 시작 지점


국사봉 정상에서 다시 산길은 북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상봉(354m)에서 산길은 급격히 자세를 낮추어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가현치로 이어져 내려간다. 많은 차량들이 제각각 속도를 내며 휑하니 스쳐 지나간다. 이 길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다. 사람보다 차가 우선이다. 생명을 담보로 길을 건너 다음 여정의 출발 지점을 살피고 차가 있는 칠장사로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태워 달라고 할 배짱은 없으니 그냥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진짜로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일까? 몸은 힘들지만 왠지 모를 성취감을 맛본다. 정맥은 계속해서 용인·수원지역을 향해 북쪽으로 이어진다.



가현치로 내려서는 길


글 고영창

영남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 4년 전부터 파주 전통마을 기록화 사업에 공동 참여 중이다. 『산경표』의 한남정맥을 중심으로 경기도의 산들을 직접 탐사하고, 그 곳의 인문지리를 공부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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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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