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걸음으로 (1) :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글 소설가 신종원 

Photo © Gianni Melotti

오늘날 남준의 무덤을 파헤치는 한 마리의 늑대가 있다. 살해당한 인간의 두개골을 갉아먹는 어니스트 시튼의 동물화 속 굶주린 야생동물이 아니라, 내륙과 공해 깊숙이 보이지 않게 매설된 지중 전선로 또는 해저 광케이블을 따라 끊임없이 질주하는 디지털 늑대. 아마도 남준이라면 이 늑대에게 두려움이나 경계심을 품기는커녕 외려 담요 하나를 덮어주지 않을까? 불안정한 통신 품질에 의해 시시때때로 해상도가 뒤바뀌는 이 가상의 짐승은 남준이 건넨 펠트 직물 안에서 부드럽고 완곡한 형태의 사인파로 다듬어진다. 남준의 유해는 뉴욕과 베를린, 서울에 흩어져 있다. 그래서 늑대도 뉴욕과 베를린, 서울을 횡단하는 도합 14시간 시차의 통신 회선을 쉬지 않고 왕래한다. 일찍이 남준이 뒤셀도르프에서 화장되어 북해에 흩뿌려진 보이스의 영혼을 1990년 서울로 불러냈듯이―이번에는 내가 남준의 영혼을 고정된 인터넷 프로토콜 주소로 불러내기 위해.

백남준아트센터 홈페이지에는 남준의 사진 한 장이 업로드되어 있다. 피렌체 출신의 사진가 지아니 멜로티가 촬영한 이 흑백 사진 속에서, 남준은 삼면이 가로막힌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있다. 남준을 둘러싼 벽감 안에는 얼핏 도록으로 파악되는 책자들과 앨범들, 그 밖의 얇은 인쇄물들이 위태롭게 놓여 있다. 어떤 것들은 이미 쓰러져 누워 있고, 어떤 것들은 보다 무겁고 안정적인 물체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어 균형을 빌리고 있다. 한편, 벽면에는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의 사진이 잇달아 붙어 있다. 연속 촬영된 이 이미지들은 물론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한정된 공간 안에 배치되며 시각적인 맥락을 형성하는 까닭에 마치 음악이 실제로 흐르고 있는 듯한 효과를 준다. 나는 이 공간을 임대 사무실로 파악하는데, 이렇게 모든 사물이 저마다의 질서와 저마다의 혼돈을 드러내면서도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남준만은 아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금방이라도 사진 밖으로 사라져버릴 것처럼 초점이 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초점을 잃곤 한다. 멜로티가 사용한 사진기가 수동 카메라였다면 손으로 렌즈를 돌리는 과정에서 핀이 나갔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멜로티와 같은 사진 작가가 손을 떨거나 조리개를 잘못 조작하는 바람에 인물 대신 배경에게 초점을 빼앗겨버리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멜로티는 이 예술가의 얼굴 앞에 자동 카메라를 들이대었을까? 아니, 나는 멜로티가 미놀타 XE-7이나 캐논 EX Auto 35mm, 코니카 도미렉스 따위의 친절한 일제 사진기를 남준에게 겨누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아마도 멜로티는 숙련된 낚시꾼처럼 카메라 바디의 릴을 감으면서 조용히 다음 이미지를 기다리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뷰파인더로 들여다보았던 이미지가 감광지 위에 그대로 옮겨질지 실패할지 알 수 없는 시간,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든 가능한 그 시간 속에서―멜로티는 붉은 수단을 입은 플로렌스 지방의 성직자들처럼 가만히 기도를 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촬영의 모든 절차를 엄숙한 종교 의식처럼 치러 내는 사진사들에게 마이크로 모터나 스트로브 라이트 따위의 기계 장치에게 도움을 빌리는 일은 사진에서 신성을 제거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카메라는 박스 형태의 물건이 아니라 고해실처럼 어두운 방이었다. 오직 선택 받은 소수만이 벽면에 굴절된 외부의 풍경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빛을 조절하고 상을 결정하는 역할은 오랫동안 신의 권능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일은 예나 지금이나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몇몇 알고 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출사 전날 자연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거나 기도문을 암송하는 모습을 금방 떠올린다. 결국 이 사진도 수동 카메라로 촬영되었으며, 모종의 오류로 인물에서 초점이 떠나버렸고, 멜로티는 암실 천장에 매달린 적색 암등 밑에서 이 사실을 눈치챘지만, 그럼에도 이대로 작품을 완성해도 좋겠다고 스스로와 합의를 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는 것이다.

사진 속의 남준은 홀로 불화한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과 풍경은 물론, 사진사의 시선과도 어울리지 않고 어긋나 있다. 만약 멜로티가 손을 떨지 않았고 남준의 몸이 떨렸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사진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에 나타나 있는 초점 오류는 사소한 실수나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의도된 목표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이 사진은 1974년에서 1975년 사이 멜로티가 비디오테이프 프로덕션 art/tapes/22에서 촬영한 초상 사진 연작의 일부인데, 같은 날 촬영된 다른 사진들에서도 남준은 흐리터분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간신히 붙잡혀 있다. 하나의 시간, 하나의 공간 안에 고정되어 있지 않은 사물처럼. 시시각각 진동하는 이미지. 다시 말해,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는 사람. 이중 피사체. 멜로티가 셔터를 눌렀을 때 남준의 모습도 결정되지만, 현재에 도착함과 동시에 현재를 떠나고 있는 남준의 시제만은 여전히 불명확해서, 이후로 사진을 얼마나 더 찍었든 남준의 형상은 좀처럼 똑똑히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단서로 남준의 앞에 놓인 기록 장치 : 타자기를 지목해 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목소리들을 옮겨쓰기 위해 더듬더듬 글쇠를 찾아 누르는 남준의 손가락들이 허공에 떠 있다. 1975년에 촬영된 이 사진, 그리고 같은 시기 남준이 구상하고 제안했던 문서 작업들을 접하지 못했다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전시를 기획한 백남준아트센터 김윤서 학예사는 좁은 방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남준의 이 사진을 보고 내가 떠올랐다고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전시를 보고 글을 한 편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도 덧붙였다. 10월 13일 전시 개막식에 다녀온 뒤, 나는 남준을 대표하는 많은 인격들 가운데 은밀하게 탈구되어 있었던 부분을 발견하고 만다. 정책가 백남준. 그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행위예술가 백남준, 음악가 백남준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멜로티의 흑백 인물 사진은 마치 남준이 1970년대에 남겨두고 온 그림자처럼 내 근처를 배회하게 된다. 당신이 기대했던 미래가 그대로 이루어졌는지 궁금해 하며. 나는 남준에게 대답하기 위해 광축 키보드 위에 열 손가락을 올려둔다.

타자기는 남준과 나를 연결하는 사물이다. 인간은 언어를 발명하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문법을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 가지 관점으로 분할된 시간선을 손쉽게 드나들 수 있다.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남준은 어떤 시제의 문장을 내려앉히고 있을까? 알 수 없다. 남준은 일단 [只今]이라고 쓰고, 이것을 zh?j?n으로 발음하거나 いま라고 발음할 수도, 혹은 그냥 지금이라고 말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자기가 드레스덴에서 생산된 에리카 제품이라면 jetzt라고 써도 좋고, 이베르돈에서 생산된 에르메스 제품이라면 present라고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분음 부호를 조판에 넣지 않은 레밍턴이나 IBM 사양의 제품이라면 그냥 now라고 적을 것이다. NOW. 이렇게. 나는 지금 현재형으로 쓰고 있다. 내가 현재 시제로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시간은 과거로도 미래로도 나누어질 수 없다. 말을 끝내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재는 중지된 시간이고, 현재는 저물녘이며, 현재는 코마 상태에 빠진 머리이다. 내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한 남준은 아직 이 사진 속에 앉아 있다. 내가 남준에게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면 남준은 곧장 의자를 밀고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남준은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나는 남준이 기다리는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狼] 한 글자를 적어 놓고 おおかみ… おおかみ… 중얼거리는 남준을 상상한다. 아니면 [Wolf]라고 적어 놓고 쿨럭이듯 Loup! Wolfe! 그것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도 좋다. 좌우간 저녁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건너오는 저 그림자는 개인가, 늑대인가? 나는 지금 남준에게 한 마리의 늑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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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원은 단편소설 「전자 시대의 아리아」로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영상, 음악, 텍스트 작업을 주로 다루며, 종이책의 안과 밖에서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와 발화를 탐구하고 있다. 최근 장편소설 『습지 장례법』(문학과지성사, 2022)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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