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우리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5월의 판타지아 부천


빛바랜 소설책의 표지 같았던 도시


마침내 트럭은 멈추었다. 노모와 어린 딸과, 만삭의 아내를 이끌고 그는 이렇게 하여 멀고 아름다운 동네, 원미동(遠美洞)의 한 주민이 되었다. -p.36, 「멀고 아름다운 동네」, 『원미동 사람들』 중에서


부천을 처음 만난 때는 언제인가. 직접 발을 디딘 때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도시가 뇌리에 박힌 것은 양귀자 작가의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 덕분이었다. 서울 중심의 사고는 그 주변 도시들을 언제나 변두리로 만들어버리지만 소설 속 부천 원미동은 실로 변두리 그 자체를 상징했다. 서울에서 밀려나, 혹은 부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엉키고 설키어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지난한 삶이 ‘멀고 아름다운 동네’ 원미동에 있었다. 하여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부천의 이미지는 휘황한 도시가 아니라 복잡다단한 주택가의 모습으로 각인되었으며 도시 이름은 곧 빛바랜 옛 소설책의 표지를 떠올리게 했다. 해서 가까운 지인이 살지 않는다면 아마도 들를 일은 없을 도시로 여겨졌다.



2023년 여름 개최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그런 부천을 다시 주목하게 된 계기는 대다수의 타지인들이 그러했듯 1997년 시작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1999년 시작한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국내를 대표하는 영상 축제로 안착한 2000년대 후반 즈음이었다. 그 명성이 매년 커져서 장르영화에 관심이 없던 나 같은 사람들도 ‘피판(PiFan, Puchon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의 줄임말)’은 알았다. 피판은 부천의 로마자 표기가 바뀌면서 2015년 ‘비판(BiFan, Bucheon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으로 바뀌고 공식 호칭은 ‘비팬’이 되었지만 여전히 피판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이들 영화제도 장르영화와 애니메이션에 관심 없는 내게 부천에 갈 빌미를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간의 이미지를 깨고 ‘어라? 여기 뭐지?’하고 도시를 다시 보게 하는 흥미를 유발시켰다. 처음 만났을 때는 평범해보였던 사람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보니 갑자기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원미동 사람들’과 ‘판타지아 부천’의 간극에서

다른 도시들이 역사와 전통에서 정체성을 찾고 관광자원을 개발할 때 부천은 ‘창조’를 선택했다. 원미동을 문학으로 옮긴 것은 작가 개인의 선택이었고 소설의 인기로 도시 지명도가 상승한 것은 우연의 산물이었지만, 장르영화와 애니메이션의 판을 깐 것은 도시의 적극적인 의지였다. 매년 국내외 각양각색 예술인들이 모여 저마다 개성있는 작품을 창작해 부천이라는 무대에 올리니 그 판은 가물지 않는 샘물 같다.



지난 2023년에 열린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 한 장면 (부천시 제공)


올해로 제28회를 맞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매년 40개국 이상 250~300개 작품이 출품, 부천시청 잔디광장·어울마당, 판타스틱큐브, 한국만화박물관, CGV소풍 등에서 상영돼 10여 일간 수 만 명의 관객들을 만나왔다. 온라인을 통해서도 축제에 ‘로그인’해 상상력이 발휘된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해 영화 마니아들의 호응이 잇따른다. 혹자는 상영 장소만 부천에 모여 있을 뿐이지 부천의 정체성은 알기 어려운 행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프랑스의 작은 휴양도시 깐이 깐느영화제(Cannes Film Festival)의 무대로 얻은 세계적 명성을 상기하면 영화제, 나아가 영상예술 그 자체를 곧 부천의 정체성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예술 도시로서 그 입지를 단단하게 다져주는 또 하나의 대형 이벤트,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있지 않은가.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올해로 제26회를 맞이한다. 



부천영상문화단지와 가까운 부천상동호수공원 풍경


이러한 배경에서 도시의 공식 슬로건은 ‘판타지아 부천’이다. 테마파크 이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슬로건 한 줄에는 이 도시가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점이 담겨있다. 판타지아(fantasia)의 사전적인 뜻은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고 악상의 자유로운 전개에 의해 작곡한 낭만적인 악곡으로 환상곡을 가리킨다. 실제 쓰임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무드를 표현하는 ‘판타지’와 비슷한 맥락으로 폭넓다. 사실 과거 원미동으로 상징되는 부천 소시민의 일상과 오늘날 영화제로 대표되는 스크린 속 판타스틱한 가상현실은 간극이 크다.

부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반듯하게 구획된 계획도시마냥 몇 가지 단어로 또렷하게 묘사하긴 어려운 동네다. 서울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이 도시에는 8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복작복작 살아가는 중이고 그중에는 ‘80년대 원미동 사람들’과 닮은 삶을 사는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80만 명이 사는 세상은 이제 물리적 공간에 제한되지 않고 무한대로 펼쳐진다. 물론 모두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이원화된 세상을 사는 요즘에 무엇이 새삼스럽냐고 할 수 있다. 툴(tool)과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콘텐츠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는 대로, 상상하는대로 이루어지는 세상. 그곳을 우리는 판타지아라고 부른다.


K-컬쳐의 원류를 만나다

부천영상문화단지는 부천에서 해마다 열리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부천국제만화축제 등 굵직굵직한 예술제들의 메인 무대다. 이 단지 안에서 방문객들이 주로 찾는 곳은 한국만화박물관이다.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만화박물관으로 한국만화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다. 상설전시관에서는 한국 최초의 만화인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 1면의 시사만화부터 만화계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1980년대, 90년대를 지나 오늘날의 웹툰까지 한 세기의 한국만화사를 짚어볼 수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특정작가의 작품이나 만화 관련 주제로 전시를 연다. 박물관 내 만화도서관은 만화 마니아들의 천국이자 만화계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불린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만화책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옛날 만화방에 놀러가듯 수시로 도서관에 들르는 이들이 많다.



한국만화박물관 외관


종이에서 화면으로 캔버스만 옮긴 오늘날 한국 만화시장은 웹툰으로 전세계적 규모의 콘텐츠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인기 웹툰은 웹툰으로 끝나지 않고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로 배급‧송출된다.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만화박물관이다. 어른들이 <고바우영감>을 볼 때만 해도, 내가 어린 시절 <아기공룡 둘리>를 볼 때만 해도 한국의 만화, 영상 콘텐츠들이 오늘날 세계 시장을 흔들어 놓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과거 옆나라 일본의 콘텐츠는 막강했고 사람들은 우리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아류에 불과하다고 비하했다.



부천만화박물관 전시실 내부 모습


2000년대 이후 불기 시작한 한류바람은 얻어 걸린 짧은 유행이 아니었다. 2022년 한국 콘텐츠의 영향력은 세계 정상급이다. 만화가 K-컬쳐의 전부는 아니지만 문화예술 선도국의 위상을 가진 이 나라에 만화박물관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 했나 싶다. 덕분에 미래의 크리에이터들이 만화책을 뒤적이며 시나브로 영감을 얻어가며 K-컬쳐의 출발점이 궁금한 사람들이 친절한 안내를 받고 있다. 가능하다면 지금보다 더 디테일하고 방대한 규모로 박물관을 확장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K-컬쳐가 지금보다 ‘덜’ 흥했던 시기에 무려 장르영화 축제와 애니메이션축제, 만화축제를 열어준 부천시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한국만화박물관은 오는 10월 제27회 부천국제만화축제를 앞두고 있다.


사철 소나무보다 한철 장미를 외치다

머쓱하지만 사실 부천 방문은 절친한 부천시민의 초대로 이루어졌다. 지인이 살지 않는 이상 갈 일이 있겠나 싶었던 이 도시에 오랜 지기가 살게 된 것이다. 마침 5월이어서 백만송이장미원에 장미가 만발하니 꽃구경 하러 오라 했다.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만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장미가 피노라고, 심수봉의 ‘백만송이장미’를 흥얼거리며 공원에 다다랐을 때 불식간에 벌에 쏘인 것처럼 장미향이 훅 끼쳐왔다. 살면서 맡아본 장미향 중 그렇게 진하고 아찔한 향은 없었다.



부천 백만송이장미원 전경


당장에 장미의 유혹에 넘어가 홀린 듯 공원으로 들어섰고 그곳엔 장미로 불릴 수 있는 꽃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은가 싶을 형형색색의 장미들이 밭을 이루고 있었다. 1998년부터 조성한 이곳 장미원은 단일 장미공원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넓은 규모의 공원이라고 한다. 장미만 161종, 3만7천여 그루에 이른다. 일 년 중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는 때는 한달 남짓. 허나 이토록 고혹적인 자태와 향으로 뭇 나그네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사철 소나무보다 한철 장미의 삶을 택할 수도 있겠다 싶다. 부천 백만송이장미원은 5월의 판타지아였다.


글‧사진=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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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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