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그리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파주 임진각 일대를 돌아보며





원하는 감정을 고를 수 있다면

여기는 어디일까. 무엇을 위한 곳일까. 임진각 전망대 위에 올라 주변을 돌아봤을 때, 이곳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임진강과 그 주변에는 여러 시설물들이 질서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처음부터 조화와 균형은 염두치 않은 듯, 시설물들은 저마다 흩어져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한다.

여러 기의 다리가 먼저 눈에 띈다. 교각만 남아 기능을 상실한 다리, 최근에 건설된 현대적 양식의 철교, 강가에 어중간하게 놓인 낡은 보도교가 있다. 그들 다리와 100m 정도의 간격을 둔 곳에 곤돌라가 설치되어 있다. 이 주변에서 임진강을 건너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곤돌라 탑승으로 보인다. 강가 광장에는 강을 향해 조성된 망배단과 평화의 종각, 끊어진 철로, 평화의 소녀상 2기가 제각기, 좁은 간격으로 모여 있다. 건너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공간인가, 건너지 못해 그저 머무는 공간인가. 추모와 기림의 공간인가, 관람과 휴식의 공간인가. 전망대 동쪽으로 몸을 틀어보니 작은 놀이동산에서 바이킹이 높이 치솟았다 내려가길 반복했고 그때마다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이동산 옆에는 제법 큰 규모의 기념관도 있다. 우리말 중에 가장 무거운 단어들로만 조합된 듯한 그곳의 명칭은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내가 선 이 곳은 희극의 무대일까, 비극의 무대일까.  

다소 어수선한 공간 너머 너른 잔디밭으로 시선을 던져본다. 여느 공원들과 비슷한 풍경이다. 덩치 큰 야외 조형물들과 벤치, 그리고 잘 정돈된 산책로를 여유로이 거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 아리송한 공간, 그러니까 임진각관광지는 방문자에게 여러 개의 보기를 던지는 것만 같다. ‘당신이 느끼고 싶은 감정에 따라 장소를 선택하세요’ 내가 원하는 감정을 고른다는 것. 쉬운 일일까?




임진강변을 서성이는 일

그러나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보기의 감정이 있다.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매우 구체적인 감정이다. 그리움의 기반에는 또렷하고 내밀한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회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이 아니어서 결코 뭉뚱그려 묘사할 수 없고 함부로 공감할 수조차 없다.   임진각이 세워진 때는 1972년이다. 이름 때문에 임진강변의 작은 정자인가 싶은데 실은 3층 높이의 별 특징 없는 네모난 건물이었다. 현재의 임진각은 원래 있던 건물을 증축해 조금 더 크고 입체적인 외관으로 탈바꿈했지만 완공 당시에는 주변이 휑한 채로 이 건물만 덩그러니 있었다. 상징적인 의미는 컸다. 1972년은 7‧4남북공동성명이 체결된 해로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이 합의를 이룬 해였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실향민들의 그리움을 달래고 평화를 염원하는 장소로써 임진각을 세웠다. 현재의 임진각 부지는 당시 1번 국도를 따라 민간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끝 지점이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의 끝. 고향에 가까워질 수 있는 최선. 6‧25전쟁 때 청년이었던 사람들은 중년이 되어 임진각 앞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죽기 전엔 돌아갈 수 있으리라, 가서 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1951년 1‧4후퇴 때 고향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오빠 손을 잡고 피난 내려온 13세 소녀는 이제 85세의 노인이 되었다. 곧 따라 내려오겠다던 부모와는 그때 이후로 영영 만나지 못했다. 5세 남동생과 삼촌, 이모들 그리고 동무들 모두 다시 보지 못했다. 할머니의 시간은 13세에 멈춰있는데 몸은 늙어 한탄스럽다. 실향민 2세가 된 할머니의 아들은 어머니를 차에 모시고 임진각도 가고 통일전망대도 갔다. 이젠 그 아들도 초로가 되어 실향민 3세가 된 손자가 조모, 부친을 모시고 임진각도 가고 통일전망대도 간다. 아들과 손자에게 이곳 임진각은 그리움의 장소가 아니다. 아들은 “임진각이 이렇게 변했네” 하고 손자는 어린 시절 놀이동산에서의 추억을 곱씹는다. 할머니는 혹여 흐려질까 봐, 잊힐까 봐 70년 내내 꼬옥 부여잡고 있던 13세의 기억들을 주섬주섬 펼쳐 놓는다. 부모님과 남동생의 얼굴, 고향의 풍경, 그들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 그 목소리….아들과 손자는 수십, 수백 번도 더 들었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들은 늘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한다. 그것만이 그들이 할머니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할머니는 이제 그 기억들도 진짜 있었던 일인가, 꿈이었나 싶다. 죽기 전에는 돌아갈 수 있으리란 희망이 죽고 나면 저승에서라도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뀌었다. 먼저 눈을 감은 오라버니는 부모님을 만났을까,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하며 그리움을 삭힌다. 임진강변을 서성이는 일, 그것은 실향한 노인이 그리움을 달래는 최선이다.             


임진각에 고인 그리움

그러니까 곤돌라와 놀이동산, 기념관 등 서로 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은 실향민 2세, 3세를 포함해 실향의 절절함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강가를 서성이는 노인들이 좀 더 오래 그리움을 달랠 수 있도록,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는 자식, 손자들에게 덜 미안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다. 단순히 관광지라는 명목하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앉은 시설들일지라도, 그곳에서 웃음소리가 퍼져나갈지언정 실향민들은 그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놀이기구를 즐겁게 타는 아이들을 보면서 안도한다. 자신들이 그만한 나이에 겪었던 전쟁의 공포와 시련을 현재의 아이들은 겪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슬픔에 공감해주지 못함을 이해한다. 애끓는 그리움으로 흘렸던 눈물은 이제 더 나오지 않는다. 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참 많은 것들을 단념했다. 그렇기에 고향을 그리던 이 쓸쓸한 장소에 해사한 미소로 찾아주는 사람들이 오히려 고맙다. 언제 와도 사람들로 흥성이는 임진각이 반갑다. 그러나 이제 그리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망배단에는 매년 추석과 설날마다 차례상이 차려진다. 실향민들은 이곳에 들러 갈 수 없는 북녘, 그곳의 가족에게 절을 올린다. 국어사전에서 ‘망배望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조상, 부모, 형제 따위를 그리워하며 그러한 대상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절을 함’이라 그 뜻을 적고 있다. 이곳이 임진각 관광지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다. 망배단에 단비와 상석이 마련된 때는 1985년이지만 실향민들은 임진각이 세워졌을 때부터 명절마다 그곳에 천막을 치고 합동 제사를 올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망배하는 실향민 1세대는 점차 줄어들었다. 전쟁 때 태어난 아이가 일흔을 넘긴 노인이 되도록 긴 시간이 흘렀다. 그들이 떠나면 임진각에 고인 그리움도 사라질 것이다. 임진각이 사라지는 날 그리움도 끝나리라 염원했던 사람들…. 그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임진각은 여전하다.




자유롭지 않은 자유의 다리

망배단 바로 너머에는 철교를 향해 대각선으로 놓인, 왠지 그 위치가 애매해 보이는 다리가 있다. 자유의 다리다.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교환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폭격으로 손상된 철교 끄트머리에 설치한 임시 교량이다. 현재는 임진강철교(당시 신의주로 향하는 경의선 하행선 철교)와 연결된 것처럼 놓여 있지만 원래는 교각만 남아있는 상행선 철교 옆에 나란히 나무로 지었던 임시 다리였다. 그런데 하행선 철교를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교로 복구하면서 임시 다리였던 자유의 다리를 철거해 도로교와 연결,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임시다리가 있어 그나마 덜 허전했던 상행선 철교는 다시금 교각만 남은 쓸쓸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도로교가 된 하행선 철교는 한동안 임진각과 판문점을 잇는 역할을 하다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의선 철도 연결사업이 착수되면서 현재의 임진강철교로 복구되었다. 임진강철교는 경의선 임진강역과 도라산역을 잇는 단선 교량이다. 도라산역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을 676m 앞둔,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자 대한민국 최전방 역이다. 2014년부터 평화용산발 생명관광열차DMZ-train가 오갔지만 2019년 이후 운행이 무기한 중단되어 한동안 기차가 다니지 않았다. 그러던 2021년 11월, 경의중앙선 전철이 이 역까지 들어오게 되어 다시금 열차가 오간다. 단 도라산역 자체가 민간인통제구역 내에 있어 임진강철교를 지나 도라산역까지 가려면 검문을 거쳐야 한다.




차가 다니는 도로교는 1998년 완공된 통일대교가 대신한다. 어쨌든 상행선 철교의 임시 교량이 세워졌을 당시, 북쪽에 잡혀있던 12,773명의 한국군과 유엔군이 이 임시 교량을 건너 귀환했다. 이를 계기로 정전 협정 이전에 독개다리로 불렸던 임시 교량이 ‘자유의 다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명칭은 참 아이러니하다. 귀환한 포로 입장에서는 자유를 되찾았지만 동시에 다리를 건너도 북으로는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자유 없는 다리나 마찬가지다. 이를 무시하고 철책을 뚫고 나갔다가는 신체의 다리를 잃을 수도 있다. 실제로 곤돌라를 타고 민통선 내로 진입하면 철책 곳곳에 붙은 지뢰 알림 팻말이 보인다. 자유의 다리 사연을 접하고 보니 이제야 전망대에서 내려다볼 때 어수선하게 느껴졌던 임진강 위 다리들의 전말이 이해된다. 교합점이 없어 보였던 교량들은 사실 한 세트였다.




그런데 파주시는 교각뿐인 상행선 철교가 못내 아쉬웠는지 교각 일부를 활용해 전쟁 전 철교의 형태를 재현하고 스카이워크와 전망대 등을 만들었다. 명칭은 자유의 다리 이전 이름인 독개다리. 독개다리는 민통선 내에 걸쳐져 있어 입장료를 내고 다리로 들어서면 민통선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곤돌라를 타도 마찬가지인데 민통선 안이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사진 촬영은 금하고 있다. 독개다리에는 미디어아트를 활용해 기차가 철로 위로 달리는 듯한 영상 스크린을 바닥에 배치했고 기차의 실내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사실 대단한 볼거리는 아니고 단지 독개다리가 있어 교각과 임진강을 가깝게 볼 수 있다는 점 정도가 의미 있다. 투명한 유리 바닥 아래로 교각에 남은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사실 탄흔보다 남아있는 교각 그 자체로 전쟁의 파괴력은 증명된다. 다리 하나가 붕괴될 정도의 타격이라면 살상력은 말해 무엇 할까.

독개다리의 끝 지점인 전망대 펜스에는 ‘이곳은 통일이 되는 그 날 철거됩니다’라고 쓰여 있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33권 『50만 살의 청춘-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파주시 : 그리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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