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이천 사람들의 천년 기도처, 설봉산 영월암

꾸밈없이 편안하고 속박없이 자유로운 천년 산사



암자에 오르는 길, ‘이천’이 읽힌다

도자의 도시 이천의 랜드마크는 단연 설봉산이다. 설봉산 하나로 이천의 역사, 문화, 예술, 교육 등 고장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삼국시대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었고 그 승패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돌아가며 군사적 기지로 삼았다. 그 흔적이 백제가 축조한 설봉산성이다. 1564년 창건한 인재의 도량, 설봉서원 또한 설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394m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오르내리는 산이기도 하다. 물 좋기로도 유명해서 계곡길을 따라 약수터만 대여섯 곳이다.



이천 설봉공원 호수 산책로


이방인에게도 설봉산은 도시의 첫인상이자 이천 여행의 시작점 혹은 기준점 역할을 한다. 이천 시가지를 감싼 설봉산 바로 앞자락에 설봉호수가 있고 호수 주변에는 이천세라피아(구 세계도자센터), 이천시립박물관, 시립월전미술관, 국제조각공원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일대를 가리켜 설봉공원으로 통칭한다. 이천에서 열리는 세계도자비엔날레, 설봉문화제, 설봉산 별빛 축제 등 이천의 굵직한 대규모 축제는 대부분 이곳을 무대로 한다.



이천 설봉공원 호수 산책로


특별한 행사가 없어도 호숫가 산책로와 쉼터가 잘 갖춰져 있어 시민과 여행자 모두 즐겨 찾는다. 이천 9경 중 세 곳이 이곳 설봉산에 몰려 있다. 설봉산 중턱에 자리한 커다란 ‘삼형제 바위’,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설봉산성’, 그리고 50년 전에 만들어진 인공저수지 ‘설봉호’다. 2016년, 경강선 이천역이 개업한 이후로는 설봉산으로의 접근성이 더욱 편리해졌다. 이천역에서 설봉산 입구까지는 3.5km 떨어져 있다. 이렇듯 설봉산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이천의 아이콘이라 할만하다.

이쯤 되면 이천은 설봉산과 그 주변만 방문해도 8할은 다 봤다고 할 만하다. 등산과 삼림욕은 물론 호숫가 산책, 박물관과 미술관 관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다. 그런데 설봉산의 ‘숨은 보석’은 따로 있다.



설봉산 등산로


할머니댁 같은 친근한 분위기와 후덕한 풍모의 마애여래입상

설봉산에 대한 긴 설명은 그 자체로 이천에 대한 소개지만 동시에 영월암을 설명하기 위한 초석이기도 하다. 한낱 이방인에게 영월암은 그 이름처럼 산중 작은 암자에 불과해 주변의 설봉호나 설봉사원에 비하면 그 존재감이 크지 않다. 그러나 설봉산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단순 관광명소에 그치지 않고 고장을 수호하는 진산(鎭山)이자 간절한 마음이 모이는 발원지(發願地)로 여겨지는 까닭은 영월암의 존재 덕분이다. 발로 찾아 직접 마주하는 작은 절의 울림은 석양녘 범종소리처럼 둔중하고 묵직하다.



영월암 전경


절은 설봉산 정상과 400m 떨어져 있다. 등산로를 이용하면 설봉공원부터 1.3km를 올라야 하고 찻길로는 700m 정도 올라야 한다. 찻길 이용 시 웬만하면 아스팔트 포장이 끝나고 시멘트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주차를 하는 편이 좋다. 차가 오르기에는 길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좁아서 위험할 수 있다. 두 다리에 꾹꾹 힘을 실어 10분쯤 오르면 사찰에 닿는다. 쉽게 이루어지는 염원이 없듯 쉽게 닿을 수 있는 정토(淨土)도 없다. 암자 입구에선 사천왕 대신 커다란 은행나무가 행인을 맞는다. 수령 640년의 노거수로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영월암에 머물며 꽃아 놓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절의 역사를 가장 오랫동안 굽어본 생명체다. 살아온 세월만큼 몸집이 장대하지만 압도적이지 않고 편안함을 주는 모양새다.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영월암은 가을 풍경이 빼어난데 이 은행나무가 있어 늦가을이면 사찰 진입로에 폭신폭신한 황금 융단이 깔린다. 도량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 오른편에 아미타전, 왼편에 안심당의 아늑한 배치가 눈에 들어온다. 시골 할머니댁의 정감어린 분위기다. 바로 마당 안쪽으로 들어서지 않고, 들어온 방향에서 보이는 종각 쪽으로 향하면 종각 뒤편으로 계단길이 하나 나 있다. 그 계단길에 올라서면 도량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가람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마애여래입상이다. 보물 822호 마애여래입상은 영월암의 상징이자 설봉산의 중심축이다. 높이 9.6m의 자연암석을 다듬어 만든 마애상으로 이천 시내를 내려다보는 방면으로 비스듬히 자리한다. 바위면 전체를 꽉 채워 조각했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 볼 때와 가까이 다가가 볼 때 사뭇 느낌이 다르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상이 보물로 지정될 때는 마애여래입상이라고 명명했지만 현재 학계에선 머리가 민머리인 점과 옷의 형태로 판단할 때 부처님이 아닌 지장보살이나 스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래서 마애조사상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사(祖師)는 한 종파를 세우고 중심이 되는 가르침을 준 사람을 뜻한다. 후덕하고 평온한 인상과 투박하고 친근한 풍모가 아담하고 예스런 분위기의 영월암과 잘 어울린다. 오래전 영월암 주지스님의 모습이었대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암석의 돌출되고 패인 부분을 입상의 구부린 팔로 표현한 ‘센스’도 돋보인다.



영월암 경내 풍경


갖은 풍파 겪어낸 천년의 기도처

마애여래입상을 등지고 서면 왼편 아래쪽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영월암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다. 탑 앞에 서면 산 아래 설봉호와 이천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은 이천시향토유적 제14호로 본래 영월암 은행나무 밑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복원을 거쳐 현재 자리로 옮겼다. 새로 조성한 부분이 있다 보니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한 인상이지만, 설봉산을 기단 삼아 서서 시내를 아우르니 올곧고 당당한 기세가 느껴진다. 물론 탁 트인 전망은 아무래도 산 정상이 낫다. 영월암 종각 뒤편의 계단길을 오르면 곧장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설봉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암자에는 마애여래입상, 삼층석탑을 비롯해 적광전 내 비로자나불상을 받친 대좌와 광배 등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문화재가 여럿 남아있다. 그러나 절의 창건은 이보다 앞선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했다고 전해진다. 영월암은 천년고찰로서 갖은 풍파를 견디며 오늘날까지 이천의 대표 사찰로 의연하게 존재한다. 그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암자를 찾아 지극한 기도를 올리고 정신을 수행했을까. 작지만 소중한 절을 지켜나가고자 했던 간절함을 대웅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월암 범종각


조선시대 중창한 영월암은 1907년, 설봉산에서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일본군이 의병을 강제 해산 시키고 불을 질러 전각 대부분이 전소되었다. 영월은 195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세워졌는데 이때 대웅전을 1948년에 무너진 이천향교 명륜당 목재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중건 당시를 기억하는 시민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천향교 또한 새 목재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일제가 1914년 해체한 이천 관아의 부재로 지어졌다는 점이다. 관아에서 향교로, 그리고 법당이 된 목재의 사연에는 망국의 설움이 짙게 배어있다.



영월암 은행나무와 대웅전


이와 같은 사실은 지난 2016년 대웅전 해체보수작업을 통해 규명됐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절의 규모에 알맞게 아담한 편이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을 등지고 왼편에 있는 전각은 아미타불을 모신 아미타전이다. 두 법당에서는 끊임없이 염불이 흘러나온다. 영월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천도재를 자주 치르는 ‘천도도량’이다. 영월암이 설봉산의 무게중심이 되는 까닭이 단지 오랜 역사와 산재한 문화재 때문만은 아님을 숱하게 열리는 경건한 의식들로 알 수 있다.

영월암은 석양녘에 가장 아름답다. 하루를 마감하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둘러보는 산사의 저녁에는 평안이 깃들어 있다. 또한 암자는 사계절 중 낙엽 지는 가을에 가장 아름답다. 일몰도 만추도 소멸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그 끝이 결국 생성, 즉 시작에 닿아있음을 영월암도, 또한 암자를 찾는 이들도 모르지 않는다.


여긴 어떠세요

영월암을 오후 느지막이 돌아본 후 박명(薄明) 즈음에 설봉공원 내 둘레길 산책을 추천한다. 호수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은은한 LED 조명이 켜져 근사한 공원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천시는 지난 7월, 공원 곳곳에 꽃, 나무, 별, 동물 모양의 각종 야간 조형물을 설치했다. 포토존도 여러 곳이어서 사진 찍는 재미도 쏠쏠하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이나 가을에는 낮에 공원을 걸어도 좋지만 한여름에는 그늘이 드물어 덥기 때문에 야간 산책을 하는 편이 낫다. 조명 점등 시간은 7~8월 기준으로 저녁 8시께다.



이천 한식당 야반의 한정식


식사는 한정식 전문점 야반이 괜찮다. 이천이 쌀밥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보니 시내 곳곳에 유명한 쌀밥 정식집이 많다. 그중 야반은 제철 재료로 만든 정갈한 반찬들과 화덕에 구운 생선구이로 호평을 얻는 곳이다. 쌀밥은 물론 이천쌀로 지은 돌솥밥이다. 가짓수만 채우려 손이 가지 않는 반찬들로 상을 채우는 식당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출처 중부일보 원문 바로가기 


세부정보

  • 이천 영월암

    주소/ 이천시 경충대로2709번길 388 영월암

    문의/ 031-635-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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