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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스코트가 ‘조선시대 정승’인 이유

의정부시, 부대찌개를 너머


의정부가 가장 잘 보이는 장소는 서울 광화문 앞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옥상정원이다. 경기도의 북부 도시 의정부를 먼저 떠올렸다면 생뚱맞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여기에서 의정부(議政府)는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을 가리킨다. 도시 의정부와 한자와 의미 모두 동일하다.

옥상정원에 서면 백악산과 경복궁 일대의 아름다운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서울의 여느 상징적인 풍경들과 비교해도 빼어난 경치다. 500년 도읍의 정신이 깃든, 가장 서울스럽고 서울다운, 서울의 심장과 같은 풍경이랄까. 시선을 원경에서 근경으로 짧게 빼서 발아래를 보면, 그러니까 역사박물관과 광화문 사이에 의정부가 자리한다. 정확히는 의정부가 존재했던 터다. 2013년부터 2021년까지 서울시는 의정부지(議政府址)를 발굴 조사했다.

시는 조사를 통해 의정부의 중심건물인 정본당, 회의장소인 석획당 등의 기초부를 확인했으며 기와 조각과 청자 등을 출토했다. 발굴 초기에는 의정부 옛터를 도심 속 문화역사공간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2021년 이를 취소하고 의정부 건물 복원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옥상에서 내려다본 의정부지


의정부는 조선시대 백관百官(정무를 맡아보던 관리)의 통솔과 서정庶政(각 방면의 정무)을 총괄하던 최상위 행정기관이다. 즉 모든 관료를 통속하고 나라의 업무를 총괄하는 곳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이 모여 국정 전반을 논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국무총리실과 부총리실이 합쳐진 기구로 볼 수 있다.

조선의 태동기인 태조 7년(1398년) 의정부의 전신인 도평의사사가 현재의 터에 자리 잡은 후 2년 후인 1400년 의정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왕권에 따라 축소와 확대를 반복하던 의정부는 임진왜란 이후 작아졌다가 고종 때 청사를 복구하며 기능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건물과 역할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의정부의 최대 번화가인 행복로 교차로 중심에 서 있는 태조 이성계 기마상


그런데 어쩌다 경기도 의정부는 기관명을 지명으로 삼았을까.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유래는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하던 태조 이성계가 지금의 의정부시 호원동 전좌 마을에 잠시 머물게 된 야사에서 비롯된다. 수없이 많은 ‘함흥차사’를 잃고 어렵게 마음을 돌린 태상왕太上王이 행차하니, 조정 대신들이 몰려와 전좌에서 정사를 논의했고 이에 조선시대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란 명칭이 지명이 되었다는 설이다. 이 유래는 곧 의정부시의 뿌리이자 상징으로 굳혀 졌다.



의정부동 사패산에 자리한 회룡사 전경


의정부동 사패산에 자리한 회룡사는 이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이 고장 대표 사찰이다. 이름의 뜻이 ‘용이 돌아온 절’, 즉 회룡사(回龍寺)다. 태조 이성계의 오랜 벗이자 스승 무학대사가 태조가 다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지은 사명이라고 한다.

의정부의 최대 번화가인 행복로 교차로 중심에는 기백 넘치는 모습의 태조 이성계 기마상이 서 있다. 의정부시의 대표 축제로 매년 가을에 열리는 ‘회룡문화제’도 태조가 주인공이다. 이 축제에선 왕실행차를 재현하는 의미로 태조 이성계와 대신들의 복장을 갖춘 연기자들이 거리 퍼레이드를 한다. 의정부 마스코트인 의돌이 또한 지명 유래를 따라 조선시대 정승의 모습을 어린이로 형상화한 캐릭터다.


의정부시 마스코트 '의돌이'


이쯤 되면 태조 이성계는 의정부시의 정신적 지주이며 불멸의 홍보대사다. 하기야 이보다 영향력있는 홍보모델을 찾기도 쉽지 않다. 숱한 역사 속 위인들 중에서도 조선의 개국 군주라는 지위가 갖는 양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데 여기에 찬물을 붓는 반론이 등장한다. 사실 의정부라는 이름은 1912년에나 문헌에 등장한다는 것. 그해 5월 28일 공포된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 경기도편>에 의하면 양주군 둔야면 의정부리라는 부락 명칭이 이때 생겼다는 것이다. 또한 의정부라는 지명은 현재의 의정부시에서만 고유하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의정부에 세금을 내는 국유지를 가리켜 간단하게 의정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의정부시의 시초가 된 양주군 둔야면 의정부리 역시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의정부에 땅값을 내는 곳이라 해서 아무 의미 없이 의정부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태조 이성계가 환궁할 때 의정부에 머문 사실이 있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함흥차사 일화 자체가 야사에서 비롯되어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 태조 이성계가 환궁 때 들렀다고 기록된 곳은 현재의 양주 객사, 노원역 일대, 정릉 등으로 의정부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그렇지만 이제와 그 모든 이성계 관련 이야기를 사실 확인 불가라고 결론 내고 의정부시 홍보대사직을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의정부의 상징적인 음식인 부대찌개를 판매하는 식당들이 모여 있는 의정부동 부대찌개 거리


모름지기 공식 기록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카더라 통신’이 더 재미있는 법이다. 왜곡된 역사는 확실하게 바로잡아야 하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전제를 분명히 한 민담이라면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나름대로 당시 민심을 반영한 이야기일테니 가치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쪼록 시간의 궤적을 좇는 의정부 여행은 태조 이성계가 주축이 될 수밖에 없기에 의정부가 어쩌다 의정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풀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의정부에 살지 않는 이방인, 특히나 역사에 과문한 나 같은 이에게 의정부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키워드가 부대찌개가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33권 『50만 살의 청춘-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의정부시 : 원조와 아류 너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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