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한강은 눈앞에, 조강은 사이에 흐른다

김포에서 닿을 수 없는 북녘땅을 바라보며


김포반도 최북단, 김포 사람들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해 염하를 만나 서해에 이르기 직전까지의 물길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과거에는 더 많은 사람이 이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바다가 시작되는 원조의 강이어서, 여러 강물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으뜸 강이라서 할아버지강이란 의미의 조강이 되었다고 하는 데 옛 기록을 보면 이름의 유래가 상세하게 전해진다. 옛날에는 조강으로 물자선들이 오갔는데 동력 없는 배가 쉽게 들고 나려면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야 했기에 물때를 알아야 했다. 고려 때는 수도 개경, 조선 때는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였으니 지금은 텅 빈 저 강물이 한 때는 여러 척의 배들로 붐볐을 것이다. 하여 조강은 오고 가는 배도 많고 조석 시각도 일정한 편이니, 그 물때를 표준화했고 이를 계기로 조강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명명한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말 이규보의 조강부가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고려말 이전부터 쓰던 지명으로 추정한다. 이규보는 조강에서 밀물이 들어오는 시각을 십이지 간지로 표현한 시 ‘축일조석시’로 남겼다.


사흘은 토끼때 사흘은 용때 사흘은 뱀때 하루는 말때이며 양때도 세번 잔나비때도 두번인데 달이 기운 후에도 이와 같도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되는 두물머리 풍경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 도하작전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강을 건너 침략을 강행했고 조강 유역 마을들은 전쟁터가 되었다. 1953년 정전협정 후에는 조강을 포함한 파주 만우리부터 강화 말도까지 구역을 ‘한강하구 중립수역’으로 지정하고 쌍방의 민간 선박이 항행 때 자기 측의 군사 통제 아래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는 내용의 협정을 했다. 그러나 이 일대는 사실상 DMZ처럼 취급되어 조강을 거점으로 살던 주민들은 흩어지고 조강에 배가 들어간 적은 전후 현재까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강은 언제나 그렇듯 자유롭게 흐르지만 그 곁에 선 사람들에게는 고립된 강이나 다름없다. 조강 남쪽에는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가 있고 조강 북쪽에는 개풍군 풍덕면 조강리있다. 누구도 조강을 사이에 둔 두 마을을 왕래할 방법은 없다.



DMZ 평화의 길 김포코스 중 평화누리길 3코스의 시암리철책길 풍경


시암리철책길을 걷는 여행은 작은 전망대에서 끝났고 해설사는 조강을 더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겠다고 했다. 일행과 함께했던 군인은 부대로 돌아갔고 사람들은 다시 승합차를 탔다. DMZ 평화의 길 걷기 마지막 목적지는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이었다. 이곳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는 없다. 공원 입구에서 군인이 신원과 인원을 확인했고 그 과정은 자못 삼엄했다. 김포반도 북단에 야트막하게 솟은 해발 155m의 애기봉은 대한민국에서 북한 땅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산이고 6·25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154고지가 바로 이곳이다.



애기봉에서 바라본 북한 개풍군 해물선전마을


애기봉에서 조강 건너 개풍군 해물선전마을까지는 불과 1.4km. 전망대에 서면 해물선전마을과 주민들이 농사짓는 논밭이 훤히 보인다. 망원경으로 보면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나는 추수를 마친 논에 흩어져 움직이는 10명 남짓한 사람들을 보았다. 해설사는 그들이 이삭을 줍는 것이라 했는데 우리나라 논에선 보지 못한 풍경이라 듣던 대로 식량난에 처한 그들의 현실을 직관하는 듯했다. 또한 그들의 복장과 행위에 대한 관찰이 일종의 관음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조차 일었다. 그러나 해물선전마을은 북한이 ‘잘 사는 우리를 보라’라고 선전하기 위해 만든 마을이다. 70년대에 지었다는 4층짜리 아파트는 완공 당시에는 나름 발달한 건축술과 세련된 거주문화를 보여주는 매개였던 모양이다. 지금은 망원경 없이 보아도 중보수 없이 수십 년간 방치돼 낡고 허름해진 외관을 확실할 수 있다. 그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최근 3백여 명이 집단 이주해 이제는 베란다에 빨래가 걸린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강가에 맞닿은 논밭과 오래된 몇 채의 아파트, 1~2층의 낡은 단층 건물, 흰색 영생탑, 독재자를 향한 찬양 문구···. 추수가 끝난 후라 더 그랬겠지만 마을은 황량한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도 골짜기 땅에 너른 강과 접해있어서인지 요새 같은 느낌도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24시간 감시받는 마을이니 요새가 아니라 철창 없는 감옥이라 해야 맞겠다. 그곳 주민들은 군인들뿐만 아니라 평생 대면할 리 없는 다수의 익명에게 관찰 대상이 되는 일상을 살고 있다. 마을을 바로 볼 때 왼쪽에 보이는 작은 섬은 유도, 오른쪽에 보이는 아파트들은 파주시(간혹 북한이라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일대다. 유도에서는 1996년 홍수로 북에서 떠내려온 황소가 발견되어 우리 군이 구출했고 ‘평화의 소’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북녘을 바라볼 수 있는 조강전망대


조강전망대는 1978년 해병 제2사단이 처음 조성했고 해마다 연말이면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를 점등해 북녘을 밝히는 뉴스가 전해지곤 했다. 군 시설이라 오랫동안 민간인의 출입은 통제되다가 2021년 전망대와 전시관, 산책로를 단장해 대중에 공개했다. 전망대 옆에는 실향민을 위한 망배단과 국군유해발굴 때 발견된 탄피로 제작한 평화의 종, 애기봉이라 쓴 비석이 함께 세워져 있다. 전망대에서 스카이포레스트가든(공원 내 정원은 워터가든, 컬러풀가든 등으로 죄다 영어 이름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산책로를 따라가면 조강의 역사와 생태를 소개하는 평화생태전시관과 VR체험관이 자리하며 다채로운 테마 정원과 공연장, 현대 예술작가들의 기획전시가 주기적으로 열리는 오픈갤러리도 있다. 해병대 마크가 곳곳에 보이지만 군기지의 흔적은 없고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충실하다.

우리나라도 파주 대성동 자유마을(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에 각각 1곳의 마을을 둔다는 규정에 따라 북한 기정동 마을과 함께 조성되었다.)과 같이 북한에 대응해 체제 선전에 신경 쓴 동네가 있긴 하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보여주기식의 경쟁(대성동과 기정동에서는 80년대 중반까지 국기게양대 높이로 경쟁하던 때가 있었다)을 하진 않는다.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의 하이라이트라면 북녘을 바라볼 수 있는 조강전망대가 분명하지만, 전망대에 오르기 전 실내 평화교육관에서 매시간 열리는 해설사의 설명회도 유익하고 김포시와 조강에 대한 안내가 쉽게 잘 정리된 전시관 콘텐츠 또한 볼 만하다. 대부분 공간이 통창으로 이루어져 조강이 보이는 풍경은 곧 해설사의 지침봉이 가리키는 대형 스크린이 되고, 전시실의 디스플레이가 된다. 북한 개풍군에서는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교육, 문화, 편의시설이 공원 구석구석에 갖춰져 있어 한두 시간은 후딱 지나간다.



썰물 때 모래톱이 많이 드러난 조강 풍경


강 건너 북녘의 풍경이 눈에 익을 즈음, 모래톱은 아까보다 더 많이 드러나 있었다. 길이 열린 것처럼 강은 얕고 건넌 마을 걸어서 갈 수 있을 듯 가깝다. 이럴 때 조강은 바다가 시작되는 강이 아니라 육지가 시작되는 강과 같다. 한강은 눈앞에 흐르고 조강은 사이에 흐른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우리 사이에.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너머의 도시들- 경기 중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김포시 : 한강, 조강, 염하>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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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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