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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모종의발견] (17) 건강한 일상을 위한 노력과 그 열매- 삼봉리 농막, 전미경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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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요즘 목화실로 수놓기 매력에 푹 빠져있다는 삼봉리 주민 전미경 님. 오로지 흙의 힘으로만 원기를 회복하여 건강한 열매를 주기를 기다린 끝에 마주한 세계이다. 건강한 일상성을 경영하기 위해 그녀가 땅과 아이들 교육과 지역에 들인 노력의 여정을 되짚어 본다. 전미경 님 가족의 농막에서 만나는 유쾌하고 통쾌한 이야기 속으로 출발!





Q. 어떻게 조안면 삼봉리로 이사를 오셨어요?


조안면 삼봉리에 이사 온 지가 한 20년 가까이 된 것 같아요. 여기는 사실 우리 땅이 아니고 시아버지 땅이었어요. 남편이 목공일을 할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 왔어요. 20년 전에 큰 애는 양수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작은 애는 초등학교 4학년이어서 여기로 전학을 했죠. 처음에는 텃새가 심하더라고요. 그래서 애들 키울 때 참 힘들었어요. 애가 한 명이랑 싸우고 있으면 옆에 형이 나타나서 같이 때리는 경우도 있었대요. 남편한테 얘기를 했더니 싸운 애가 남편 친구 아들이더라고요. 지역 출신 남편이 나서고 어른들이 중재를 하니까 바로 해결이 되었고 그 이후로는 학교에서 참 잘 지냈어요. 여기 와서 제일 좋았던 게 우리 아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는 거예요. 산에 뛰어다니고 자기가 만들고 싶은 거 다 만들고 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림 그리고요.



Q. 지역에서 그 동안 하신 일은 무엇인가요?


제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게 들로화랑 1997년 마을 미술 사업에 참여한 거예요. 우리 동네 부엉이마을 오다보면 집집마다 이정표가 다르게 표시가 되어 있어요. 우리 집은 별하고 달이 있고 아랫집에는 무당벌레가 있고 자세히 보면 집집마다 약간 다르게 표시되어 있어요.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서 나무들이 훌쩍 커버렸죠. 그래서 그 팻말들이 사라졌을 수가 있지만요. 지금 우리 집 앞에 있는 측백나무 밑에 벽을 쌓고 거기에 나무조각을 되게 많이 붙였어요. 담쟁이가 지금 많이 있는 것도 그때 작업의 흔적이에요. 그리고 동네마다 마을 입구에 의자들이 놓여 있는데 그것도 그때 작업한 거예요.



당시로 보면 동네 주민들하고 소통을 하고 싶었는데 저는 동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주민인 거죠. 그래도 뭔가 활동하고 싶어서 부엉이마을 인터넷 카페도 만들어서 ‘작은며느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어요. 맨날 아버지 이름 팔면서 이주민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지역 일에 직접 뛰어들어 주민자치위원도 하고 생협에 봉사도 하고 도서관 활동도 하고요.


일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좋았어요. 소통하는 것도 좋았고. 일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우리집에서 호박잎에 피자 먹으면서 사이가 굉장히 돈독해졌어요. 여름에 일을 하니까 집에 있는 호박잎 따다가 반찬을 해드리고요. 내가 옛날에 피자 가게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집에 피자 오븐이 있어서 피자 만들고요. 그래서 호박잎하고 피자예요.


일의 보람 이런 거보다는 일 자체로 즐기고 했는데 뒤에 남는 말들 때문에 상처도 적잖이 받았어요. 제가 인터넷을 절대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그만 민원이라도 있으면 어르신들이 저한테 인터넷 민원 올리라고 그러시고 전화하라고 막 그러시는 거예요. 안 되면 내 책임이라는 말씀도 하시고요.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거잖아요. 결국 제가 한번 어른들께 아니라고 말씀드렸더니 반장을 그만두게 되었어요. 반장하다가 그렇게 그만둔 사람은 아마 제가 최초일 거예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제가 반장할 때도 전(미경) 반장이고 그만두었는데도 전(前) 반장이라고 어른들이 놀렸어요. (웃음)


그리고 나서 생협에서 봉사 활동도 했어요. 지금 생협 사무실 자리가 옛날에는 재활용 매장이었어요. 집에서 입던 옷이나 안 쓰는 가전제품들을 갖고 와서 팔아서 수익을 만드는 거였어요. 이 지역에 조손가정이 은근히 많아서 수익으로 그 아이들을 뒤에서 표 안 나게 도와줬어요. 당시에는 한 달에 한 6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매월 도와줬던 것 같아요. 일부 남은 금액으로는 재활용 매장을 모양 있게 만들고 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있을 곳이 없으니까 아이들이 있을 곳도 만들었고요. 1, 2층을 구분해서 1층에서는 전시를 하고 2층을 아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2층이 지금은 테라스로 남아있어요. 2층은 우리가 무료로 리모델링을 해줬어요.


사실 제가 봉사를 하면 남편한테 항상 집 지어달라는 주문이 들어오더라고요. (웃음) 내가 봉사를 해야만 주문이 들어오는 거예요. 내 것만 움켜쥐고 있으면 일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죠. (웃음) 남편도 어느새 알더라고요. 아, 그렇다고 제가 일한 부서, 단체에서 일이 들어온다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냥 제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할 때는 남편에게도 일이 많이 들어온다는 말씀이에요. 심지어 다른 지역에서도 일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도 감사하니까 “나는 평생 봉사를 해야 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봉사가 재미있기도 해요. 봉사가 다른 것보다 제게 만족감이 크니까 계속했던 거죠.


생협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책 읽는 걸 무척 좋아하셔서 도서관도 많이 이용했는데 양수리 살고 계신 최소연 님이었나? 1박 2일 책 읽기 제안을 해서 올나이트를 했었어요. 자기가 앉을 수 있는 쿠션이나 베개 같은 거 갖고 와서 기대앉아서 읽고 싶은 책을 밤새도록 읽었어요. 책만 읽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각자 집에서 맛있는 거 해가지고 와서 테이블 하나에 세팅해 놓고 먹으면서 책 읽고, 밖에 나가서 얘기도 하고요. 그게 몇 해 이어졌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없어져서 아주 아쉬워요.


생협에서 하는 조그마한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생협 활동가들이 무료로 강사도 해주고 전시회도 많이 가졌지요. 예를 들면 야생화 도안을 가져와서 야생화 수를 놓았어요. 1년에 한 번 프로그램 갖고 와서 애들 만들어주고 또 악기를 배운 사람들은 악기 연주도 해주고 정말 재밌게 놀았어요.



Q. 목공 수업을 하신 적도 있으시다고요?


남편 목공 작업장에서 남편 도움 하에 목공 기계 다루는 걸 조금씩 배웠어요. 우연한 기회에 슬로시티에서 하는 지역 체험 프로그램 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제가 1등을 했어요. ‘새집 만들기’였는데 못자리 구멍이 뚫려 있는 나무판에 아이들이 직접 못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새집이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을 2011년부터 4, 5년 했어요. 의외로 단체 체험 활동하러 오는 애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지역 아이들하고 ‘내 마음 알기’라는 프로그램을 일주일 동안 했어요.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처음에는 간단하게 도마 만드는 수업부터 시작해서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고 가운데 촛대 놓고 엄마, 아빠랑 기도하는 수업이었어요. 마지막에는 엄마, 아빠한테 가서 여태껏 말 못 했던 것을 말하는 순서가 있었어요. “난 뭐가 되고 싶었는데 뭐 때문에 못 했습니다.”라고요. 부모님들이 호응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큰 힘이니까 말하고 싶은 걸 말해보라고요. 애들 반응이 굉장히 좋았고 정말 좋아했어요.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연 거지요. 아줌마가 갑자기 와서 아이들한테 밑도 끝도 없이 “너 뭐가 되고 싶니?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니?” 말하면 말이 안 돼요. 그래서 그냥 목공 작업, 사포 작업하면서 아들하고 몇 번 잘 놀았어요. 우리 집 앞에 언덕이 있어서 눈이 오면 썰매도 타고, 라면 준비해서 라면도 먹이고 하면서요. 저한테도 굉장히 좋은 추억이 됐어요. 마침 저를 코칭해주는 선생님이 양수리에 계셔서 도움을 받았어요. 제 주위에는 항상 좋은 코칭 선생님이 있어요.



Q. 지역에서 농사도 계속 하고 계신 거죠?


여기서 20년 가까이 농사를 지었어요. 이전에는 여기 전체가 논이었어요. 우리 땅에 있던 연못에서 나온 물로 우리 아버지 때 이 동네 논에 물을 다 댔대요. 그러다가 농사짓는 사람들이 논을 포기하고 전부 밭을 만들어 버린 거지요. 그래서 굳이 물을 대주고, 물꼬를 내줄 필요가 없어진 거예요. 남편이 건축하는 사람이니까 물꼬를 막아버리고 땅을 파서 조그맣게 연못을 만들었어요. 나머지 땅은 밭으로 만들고요. 모터를 달아서 연못에서 우리 밭, 비닐하우스 양쪽에 나누어서 물을 쓰지요. 850평인데 밭농사 짓고 위쪽에는 나무를 심어놨어요. 우리 식구들이 먹는 거니까 건강하게 먹자 생각해서 농사지어요.


저는 생협에서 있었잖아요. 식생활강사 자격증도 있어요. 생협에서 실생활강사를 많이 배출했거든요. 저는 유기농이 아니라 무기농이라 하지요. 아무것도 안 하는 무기농. 우리 동네에 제초제 안 뿌리는 사람 없을 거예요. 유기농도 유기농에 쓰는 제초제가 있어요. 농약도 유기농에 쓰는 게 따로 있어요. 안 쓰는 건 아니에요. 제초제는 진짜 독하고 엄청 무서운 거예요. 살충제는 죽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초제는 형체를 완전 바꿔 버리고 돌연변이를 만드는 거예요. 저는 진드기가 아주 많거나 하면 약은 칠 수가 있는데 제초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 땅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제초제는 한 번도 안 뿌렸어요. 제초제가 뭔지도 몰라요. 풀 좀 더 있으면 어떠냐고요. 우리가 뭐 깨끗하게 만들어 팔 것도 아니고요. 비닐하우스에서 우리 가족들 먹을 것 농사짓고 이웃들과도 나누어요. 고춧가루는 조금 팔기도 했는데 수익이 될 정도는 아니고요.


그래도 수익 구조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은 했어요. 일단 밤나무랑 대추나무를 심어봤어요. 대추나무는 다 죽었고 밤나무는 살아 있어요. 고추를 심었는데 고추들이 한 번 빼고 계속 다 죽어버리는 거예요. 비닐하우스에 심어도 똑같았어요. 장장 5년을 그랬어요. 모종으로 300~400개를 심었는데 고추 10근 땄었죠. 우리는 그때 다른 일도 있고 하니까 우리 먹을 만큼 나오면 되지 싶어서 그냥 내버려뒀어요. 주위 분들이 약을 하라고 했지만 하지 않았어요. 두 번째에도 또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도 약은 안 했어요. 어디까지 가나 싶어서 그 다음에는 오기가 생기는 거예요. 내가 농사를 너무 못 짓나? 물론 제가 농사를 잘 못 하기도 했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5년 동안 약 안 하고 계속 심었어요. 5년 지나고 나서 제가 고추를 50근을 땄어요. 고춧가루로 30kg예요. 그래서 나눠 먹었죠.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싶더라고요. 그때 한참 EM(Effective Microorganisms, 유용한 미생물)을 하던 때라 제가 고추가 작을 때 작다고 내버려두지 않고 EM을 줘가면서 정성껏 몸체를 키워주니까 고추가 쑥쑥 자라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벌레도 별로 없이 고추가 잘 되더라고요. 뜨겁고 햇빛이 좋으니까 하우스에서 잘 자랐어요. 고추를 예로 들었지만 모든 작물들이 다 그랬어요. 상추를 심어도 상추가 하나도 안 났었어요. 자라질 않아요. 토마토를 심어도 토마토가 맺히지 않고요. 자두나무가 하나 있는데 15년 만에 열매가 맺혔어요. 자두나무도 그냥 내버려뒀어요. 흙 돋우고 거름 주고 하면 충분히 바로 열릴 수 있다고 사람들이 얘기했지만 저는 그냥 두었었어요. 그러더니 15년 만에 자두가 달렸어요. 자두가 엄청 열려서 나무가 휘어서 자두가 막 떨어져요. 이제는 블루베리도 잘 열리고요.


거름은 줘요. 제일 좋은 건 구덩이 파서 개똥 넣는 거예요. 그리고 재를 옆에 놔두면 농사가 정말 잘 되더라고요. 호박 구덩이 옆에다가 구덩이 하나 더 파서 재를 넣어 놓으니까 호박이 아주 잘 됐어요. 호박이 물을 엄청 좋아해서 많이 먹어요. 호박 심어놓고 옆에 물구덩이 만들어서 거기다 물 버리면 호박이 정말 잘 자라요. 우리 가족이 먹는 건 깨끗하게 지켜야지요. 가족이 먹는 정도는 농사를 지금처럼 계속 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잘 되고 있으니 굳이 뭘 더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우리 땅에는 약을 한 번도 안 썼기 때문에 뭐든지 심어도 돼요. 밤도 잘 자랐고 두릅도 잘 자랐고, 다 잘 자랐어요. 그래서 그런지 무당개구리하고 도롱뇽이 많이 놀러 와요.



Q. 실학박물관은 알고 계셨나요? 실학박물관에서 하고 싶은 활동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제가 실학박물관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잘 알고 있지요. 우연히 알았는데 실학박물관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면 약간 지원을 해준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동아리 활동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풍물 같은 거요. 라이딩이나 자전거 동아리도 한번 만들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책 읽기를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주위 사람들한테 좋은 책 추천도 받고 속에 있는 말도 밤새워 가면서 같이 해보고 싶고요. 그렇게 만난 선생님들이 참 오래가더라고요. 코칭 선생님들이 그런 경우거든요. 의자 싹 치워버리고 바닥에 깔 방석 같은 거 갖고 가서 앉아서 책 읽고 피곤하면 한쪽에서 자고 저녁에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요.


괜찮은 프로그램이 들어와서 장기적으로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실학박물관에서 관측프로그램 등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반응들이 꽤 괜찮아요. 특히 목화 심기 프로그램이 있어서 실제로 목화 커가는 과정 보면서 실까지 만드는 과정까지 아이, 부모님 참여해서 같이 공부를 하고 있거든요.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면 저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올 것 같아요.


현재 제가 꽂혀 있는 작업은 자수예요. 전 그게 너무 좋아요. 목화솜을 뭉쳐서 아담하게 애들 애착 인형 같은 것을 만드는 것도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요즘 애착인형도 양모가 아니라 목화솜으로 굉장히 많이 나오거든요. 아기들이 갖고 노는 거니까 양모보다 목화솜이 더 좋죠. 이 동네 학교도 있고 부모님들 호응도 좋고, 다른 지역에서 오는 사람도 많아요.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고요.


동네 분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도 있어요. 얼마 전에 조끼 만들기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목화로 실을 뽑아서 옷을 만들어야 하지만 실제로 옷감을 만들지는 못하니까 박물관에서 면 조끼를 장만해 와서 거기다가 옥단추 달고 노리개도 달고 일부를 우리나라 전통 옷으로 만드는 거예요. 동네 사람으로 한정해서 20명 참여했는데 다 채워졌어요. 할머니들은 그때 마을 행사가 겹쳐서 못 오시고 젊은 분들, 애들 학부모들 중심이었는데도 많이들 와서 인원이 넘쳤어요. 실생활에 쓸 수 있는 걸 하면 동네 사람들이 더 호응하는 것 같아요.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옛날 같지 않아서 물건들이 너무 흔하잖아요.




Q. 지역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 아들이 고등학교 때 내신이 9등급이었어요. 그런데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어요. 면접이 아니고 기능으로만 100% 들어가는 거였는데 수시로 대학을 합격했어요. 우리는 아들을 학원을 보낸 적이 없어요. 맘대로 놀았어요. 제가 이건 진짜 이상한 징조다,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냐 했어요. 그렇지만 특별한 것이 있어요. 여기 있으니까 아이들 생각이 달라져요. 애가 굉장히 사려가 깊고 많은 것을 포용할 줄 알아요. 길가에서 할머니가 뭘 팔고 있으면 이 녀석이 떨이라고 하죠, 그걸 다 사갖고 와요. 짐 다 들어드리고요. 어릴 때부터 그러더라고요.


학교 다니면서 문제가 하나 발생한 적이 있어요. 우연히 길 가다가 아이 하나가 다른 사람한테 맞게 된 거예요. 그런데 다른 일반인 학교 같으면 아무도 이 사태에 대해서 증인을 안 서주려고 하겠죠. 그런데 여기 부모님들은 애를 데리고 같이 증인을 서주더라고요. 동네에서 같이 어우러지면 타인이라 생각하지 않고 다 가족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 동네는 동네분들이 아이들을 같이 키워주셔요. “너 어디 집 애 아니야? 왜 그러고 다녀? 빨리 집에 안 들어가?” “너 밥 먹었냐? 여기서 밥 먹고 가.” 동네분들이 그렇게 같이 애를 키워주시는 거죠. 아이를 키우는 건 마을 전체라는 말이 딱 맞아요.



Q. 지역에서 풀어가야 할 숙제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여기가 상수원 보호구역일 뿐만 아니라 그린벨트이기도 해서 2가지 제한에 묶여 있어요. 사람들이 항상 그 생각을 못해요. 수자원공사에서는 기껏 해봤자 이 지역의 원주민들한테 1년에 한 300~400만원 주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피해자인 거예요. 우리는 깨끗한 물 보낸다고 땅값도 제값을 못 받는데 상수도 요금, 수도 요금 다 똑같이 내요. 나이가 들어서 땅을 좀 처분하고 일을 접고 싶어도 땅이 팔리지가 않아요. 그러면 나라에 팔 수밖에 없는데 나라에 파는 거는 공시지가에 팔아야 해서 가격이 얼마 되지도 않아요.


다른 그린벨트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 몇 년 이상 농사를 짓거나 거주했으면 그 사람에게 집을 짓거나 그 땅을 매매할 수 있는 권한을 준대요. 여기는 그런 것도 전혀 없고 귀농 귀촌하시는 분들한테도 땅 매매가 안 돼요. 지금 그런 규제는 없어졌지만 6개월 이상 여기 살아야만 건축 허가가 난다는 말까지 있었어요. 저희 아랫집은 땅을 농림부 쪽에 팔았대요. 수자원은 너무 박하게 준다고 하고요.


어른들 중에 아직까지 힘이 있으신 분들은 당신 연금 좀 나오고 1년에 300~400만원 받으면 땅을 팔지 않아도 생활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굳이 땅을 팔려고 하지도 않지요. 그런 분들은 실질적으로 이런 심각성을 모르는 거예요. 어른들은 아주 막연하게만 알고 있어요. 우리가 우리의 주권을 행사하려고 하는데 보니까 주민들은 별로 없더라 이거지요. 주민 참여도가 낮다는 거예요. 죄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지요. 정작 목소리를 내는 주민들은 단체장이라고 해서 의용소방대, 무슨 부녀회 그 정도로 형식적이잖아요. 실질적으로 그 내용을 깊이 있게 모른다는 거예요. 자기 땅에 대한 재산권을 행사하려면 앞으로는 주민들이 실상을 알아야 해요.





** 아무것도 나지 않는 땅에서 많은 것들이 열매 맺는 땅으로 일구어 온 전미경 님의 지난한 시간에 경의를 표한다. 그렇게 도달한 일상성과 항상성에 무한한 응원을 보낸다. 앞으로 또 이 분은 어떤 일상을 일구어낼까? 15년 만에 가지가 부러질 만큼 많은 자두를 맺은 나무처럼 끈기 있는 원칙이 지금처럼 유쾌하게 살아남기를 기원한다.





2025 실학박물관 지역활동가 아카이브 <모종의 발견>

조선 후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고민하던 학자들을 실학자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활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종의 발견>은 지역 곳곳에서 싹트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찾아 숨겨진 가능성과 가치를 세상에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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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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