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종이’로 세상을 창조하는 남자

경기학광장Vol.2 _ People & Life

< ‘종이’로 세상을 창조하는 남자 >

- 경기학광장Vol.2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종이로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1세대 종이모형 전개도 디자이너 장형순 씨가 그 주인공. 국내에서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이 직업, 이 작업에 오랜 시간 몰두해 온 그는 전 세계 어린이가 우리나라의 문화재 종이모형을 만드는 그 날을 향해 지금도 달리고 있다.


“화면 속 만화 캐릭터를 갖고 싶다!”


장형순 종이모형 전개도 디자이너는 마법사다. 언제 어디서나 종이만 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전개도를 그려 직접 만들고 간직할 수 있는 종이모형으로 만들어낸다. 국내 대표주자로 꼽히는 만큼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 화려한 수상 쾌거는 물론, 유명 전시회에 ‘작품’으로서의 종이모형 창조물을 선보이고 있다.

처음부터 이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만화 속 캐릭터를 소유하고 싶은 소년이었다. 평생을 함께할 일은 대부분 이렇게 순수하고 소소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어렸을 때 전지(하얀 종이) 위에 앉아서 크레용을 잡고 마구 무엇인가를 그리는 모습이다. 주변 분들은 ‘그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고 말씀하신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누나와 형을 둔 막내는 존재감이 없는 아이로 컸다. 있는 듯, 없는 듯한 학생이었다. 그럼에도 유독 눈에 띄는 수업이 있었으니 미술 시간이었다. ‘아, 그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통했다.

그림을 잘 그리던 소년은 고등학생이 되어 만들기에 집중했다. 스머프와 가제트 형사 등 좋아하는 만화 속 캐릭터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고. 흑백텔레비전이 컬러 시대로 변화던 즈음에 일주일에 한 번 또는 평일 정해진 짧은 방영 시간에 만나는 캐릭터를 세밀하게 그려내고자 텔레비전 앞에 오로지 손과 눈만 움직이며 한참을 앉아있기 일쑤였다. 그리기를 반복해 한 달여가 지나면 원하는 캐릭터를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텔레비전을 전혀 보지 않고도 그 캐릭터를 그릴 수 있게 됐는데도 목말랐다. 그래서 만들기 시작했다.”

캐릭터 상품이라는 단어도 없었고 장난감도 많지 않은 시대였다. ‘내가 만들어 보겠다’라고 작정한 고등학생 청년은 하얀 종의 위에 그렸던 캐릭터를 자르고 붙여 눈 맞춤할 수 있는 크기의 입체적인 종이모형으로 완성했다.



“랜드마크를 짓겠다!”


당연히 미술대학에 진학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틀렸다. 장형순 디자이너는 미술 대신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가의 길로 항로를 잡았다.

“당시 미대 입시를 치르기 위해서는 필요한 기술을 미술학원에서 배워야 했다. ‘누나와 형이 있는데 막내인 나까지 돌아올 경제적 여유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미술대학 진학을 꿈조차 꾸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그림을 좋아했던 형이 건축학도가 되어 ‘건축도 굉장히 재미있어’라는 말에 영향받아 자연스럽게 건축과를 선택했다. 아주대학교 건축학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생 시절이 즐거웠다고 술회한다. 친구들이 종종 ‘이것이 가능한 공간일까?’, ‘사람들이 부딪히지는 않을까?’ 등을 물어 오면 입면도로 그려내 잘못된 부분을 짚어주고 개선 방향을 제시했다. 건축의 꽃이라 불리는 설계 부문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설계도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학내 플래카드도 걸리고 꽤 많은 상금도 받았다.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던 청소년 시절과 달리 장형순은 주목받았고, 조금은 다른 일상이 펼쳐졌다.

“내 머릿속에는 공간이 3차원으로 잘 보였고 동기나 선후배의 질문에 무리 없이 공간을 스케치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행복했고 즐겼다. 나는 꿈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랜드마크를, 내 건물을 만들 수 있게 될 거야’ 라고”


“사람 죽이는 것을 만들까 봐 두렵다!”


스스로 즐기고 인정받은 만큼 건축가로서 안정된 길을 걸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생의 굴곡은 항상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대학 졸업 전 사귄 연인(지금의 아내)이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고, 그 역시 함께 대학원생이 되기로 정한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대학원 시험에서 홀로 낙방하며 군대에 갔다. 제대 후 건축계 회사에 입사를 선택했다면 또 달라졌을까. 그는 군 제대 후 다시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대학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그해. 그는 아르바이트생으로 다녔던 건축회사에서 너무나 선명한 안타깝고도 끔찍한 비명을 듣는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터진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이 뿌옇게 변하는 그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건축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된다. 랜드마크 설계자를 꿈꿨던 청년은 큰 빌딩에 올라가면서 이 건물이 필요한 모든 재료를 오롯이 사용한 것인지, 이 건물을 지으며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고통받았을지, 혹여 이 빌딩 때문에 사람이 죽지는 않을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과연 내가 이 모든 것의 책임을 질 설계자가 될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 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적 갈등을 억누르며 사회에 진입하려던 때에 IMF가 터지면서 입사마저 쉽지 않았다.

“많은 사건이 나를 괴롭혔다. 어렵게 입사하고 결혼 날짜를 잡았는데 회사에서 잘리기까지 했다. 백수가 결혼을 준비하는 상황에 몰렸다.”

학교와 다른 조직 시스템과 사내 문화에 힘들었던 두 개 기업에서 잇달아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세 번째 설계회사에서는 좋은 상사를 만났고 ‘꽤 괜찮은’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15개월 만에 사표를 내면서 마무리했다. 고등학생 시절 장형순 디자이너를 사로잡았던 캐릭터에 다시 빠진 것이 사달이 됐다.

“회사에 다니던 중 캐릭터 공모전에 응시했다가 입선했다. 시상식에 가는데 문득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직장에 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조직 시스템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에 도달했다.”

건축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던 그는 어른과 아이 모두 안전하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눈을 돌렸다. 그 길로 회사를 그만뒀다. 다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관련 회사에 취업했다. 잊고 있던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선 것이다.




“종이모형으로 꿈과 희망을 주겠다!”


2000년부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캐릭터 디자인이 가능한 회사의 문을 열심히 두드렸다. 어렵게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에 입사했지만, 여전히 그의 인생은 암흑기였다. 원화를 그리는 정직원이었던 그는 수십 컷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동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들이 월급은 밀리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목격했다. ‘나는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친구로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종이를 주제로 한 전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이 전시는 장형순 작가가 본격적으로 종이모형 전개도 디자이너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토마토 PNC라는 회사가 기획한 <종이충격> 전이었는데 공룡이나 곤충을 종이로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 했다. 어린이 관객이 종이모형을 관람하며 꿈과 희망을 품는 모습을 봤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임을 깨달았다. 전시 기획사 대표를 찾아갔는데 디자이너는 필요치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지콘디자인’ 회사를 창업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못 느꼈던 어린이와의 직접적인 소통을 추구했다. 없었던 직업에 도전했던 그는 이후로도 무모하게 느껴질 만큼 목표를 향해 내달렸다. 서울시와 대형 연예인 기획사, 유니세프 등에 전화를 걸어 청계천 보호종이나 연예인, 단체를 상징하는 캐릭터 등 관련 종이모형을 제작하겠다고 제안했다. 종이모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단 공짜 캐릭터 디자인을 제공하면서 이를 계기로 종이모형으로 제작하는데 투자하는 순환 구조를 기대한 것이다.

“그렇게 참 무모했던 6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잡상인 취급도 받고 거절당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연히 시장통에서 국내외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예술교육을 진행하던 대안공간 ‘스톤앤워터’를 알게 됐다.”

지콘디자인을 설립하고도 이어진 긴 암흑기의 어느날. 서울 한 대형 서점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후 버스를 타고 수원의 신혼집으로 내려가던 그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그날이다. 그는 버스 안의 안양예고 여학생들을 보며 홀로 ‘이런 곳에서 미술수업을 하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곱씹다가 속마음을 밖으로 내뱉었다. 여학생들을 향해 “미술 시간에 그림 그리고 만들기도 하나요?”라고 묻고서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려 하는데 가방에서 그 작은 네모가 나오질 않는다.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향한 승객들의 뜨거운 시선을 뒤로하고 허둥지둥 명함을 건네고 내린다. 급하게 하차한 그곳이 머지않은 미래에 직업실을 꾸리는 안양이었다. 새로운 집이 있는 안양의 석수시장을 거닐다가 그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미술대안공간으로 꼽히는 스톤앤워터의 전시와 참여작가, 기획자 등을 종종 스치듯 우연처럼 만난다. 박찬응 관장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박찬응 스톤앤워터 관장을 만나 종이모형 전개도 디자이너인 자신을 소개하고 몇 달이 흘렀다. 박 관장은 스톤앤워터에서 진행할 예술교육의 강사로 참여할 의향을 물었고 그렇게 장형순 디자이너는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그는 예술 강사로 활동하면서 종이모형으로 꿈과 희망을 주겠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외국의 문화재를 종이모형으로 만드는 아이들 손에 탈춤 추는 <탈뱅이>와 <금동미륵보살> 등 우리나라 문화재 종이모형을 건넸고, 방송사 캐릭터와 어벤져스와 같은 유명 캐릭터를 의뢰받아 제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루스’, ‘젠더시스’ 등의 캐릭터와 소설, 종이모형을 창작하면서 ‘기술자’ 아닌 ‘예술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처럼 주목할 만한 직업인이자 독특한 작품 세계가 서서히 알려지면서 방송 출연도 잦았다. 그러던 중 장형순 작가를 각성시키는 형제를 만났다.

“불치병에 걸린 이의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는 방송을 통해 루게릭병에 걸린 형제를 만났다. 그들에게 종이모형 전개도 디자인 작업을 가르쳐 주면서 종이모형이 ‘감탄사’ 이상의 경외심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그어뒀던 종이모형의 한계점을 거두게 됐다.”

장 작가는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에 종이모형 전개도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업을 개척하고 활동했지만 ‘문을 열었을 뿐 길이 없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고민 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후회는 없 다’고 강조한다.

“먼 미래를 보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안달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며 가끔 고개 들어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만 생각한다. 그렇게 가다 보면 원하는 삶에 조금씩 닿지 않겠는가.”

돈을 버는 행위로서의 직업보다 자신을 자신이게끔 하는 일을 찾아 집중해 온 장형순 작가. 그 순수한 열정에서 탄생한 이야기와 캐릭터가 지난 20년 내내 꿈꿨던 것처럼 전 세계의 사람들과 만나 희망과 꿈을 주는 그 날을 바라본다.





글 류설아

수원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지식재산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다. 신문과 방송사에서 15년 동안 취재기자로 활동, 한국기자상을 수상하고 인간의 삶에 주목하는 다양한 저술을 펴냈다. 현재 구술사 채록 등 프리랜서 인터뷰어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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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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