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실학박물관

[모종의 발견] ⑫ 돌아와 밭머리에 푸르게 서서 - 생협 활동가 인디언 블루

2025 실학박물관 지역활동가 아카이브

가을 하늘이 푸르게 푸르게 깊어가고 있다. 하늘이 푸르게 보이는 것은 햇빛의 푸른 빛이 다른 색보다 더 많이 산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다. 우리 눈에도 파란색에 민감한 세포가 있어 파란색 빛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깊어가는 푸른 이와 이를 지켜보는 이들로 만들어가는 푸른 빛이 여물어가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로, 두물머리로, 구례로 먼 길을 돌아와 다시 밭머리에서 푸르게 서서 명랑한 가을 하늘 같은 새로운 궁리에 즐거운 사람이 있다. 생협에서 일하는 인디언 블루이다.





Q. 간단히 자기소개를 좀 해주세요.



저는 인디언 블루입니다. 제가 스물몇 살 때, 인도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본 푸른빛이 있어요. 블루시티라고 불리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서 본 블루에 매료가 되어서 물어봤더니 인도 사람이 ‘당연히 이것은 인디언 블루지.’하고 아주 단호하고 단순하게 대답했어요. 그 후로 닉네임을 ‘인디언 블루’라고 쓰고 줄여서 그냥 ‘블루’라고도 해요.


제게는 그 인도 여행이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었어요. 어려서 만난 선생님에게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소외된 것들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인도에 가서는 뭐랄까, 학교 정규과정에서 배웠던 삶의 모든 가치가 완전히 뒤바뀌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초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듯한 상태, 삶의 가치나 종교나 체득한 것들이 한 방에 다 무너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때 그 순간이 여전히 중요해요.





Q. 두물머리에 오기까지 사연이 길다고 들었습니다.



길다면 길죠. 본래는 부산 사람인데, 대학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살다가, 최근에는 또 구례에서 한 6~7년 살다가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었어요.


몇 년 전에 두물머리에서 4대강 반대 투쟁에 참여했었어요. 그때는 여러 단체, 조직, 친구들이 몰려와서 연대해서 싸웠는데, 그때 저도 와서 농부들하고 연대하고 농사지으면서 함께했어요. 그런데, 그때 아저씨들이 “블루는 농사 체질이야.” “딱 농사가 체질이야.” 그러면서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셨어요. 나는 내가 진짜 잘하는 줄 알았어요. 그냥 격려하는 말씀이란 것을 정말 몰랐어요.


그때가 본래 직업이던 도서관 사서는 그만두고 구례 내려가기 전이에요. 잠깐 ‘사직동 그 가게’ 매니저로 있었어요. 4대강 반대 운동하는 김에 농사지은 걸로 음식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때 두물머리에 여러 청년 무리가 있었는데 그중 제일 열심히 활동했던 것이 에코토피아 친구들이랑 록빠작목반이었어요. ‘록빠(Rogpa)’는 티벳말로 ‘친구’라는 뜻인데, 티벳난민의 자립을 지원하는 단체예요. 여기에서 운영하는 가게가 ‘사직동 그 가게’고 록빠작목반은 록빠의 도시 텃밭활동 모임이고요. ‘사직동 그 가게’를 중심으로 록빠 활동하던 사람들이 두물머리에 와서 함께 불복종 텃밭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때 만났던 농부 중 하나가 최요왕 아저씨이고 그때 연대해서 우리한테 밥해주던 언니가 데레사(김현숙)님이에요. 데레사언니도 그 인연으로 지금 여기에서 농사짓고 있는 거잖아요. 4대강 투쟁 끝나고 제주도로 떠났었는데, 돌아와서 정말 큰 농부가 되셨어요. 본인이 진짜 열심히 잘하니까요.


4대강 끝나고 다들 흩어졌지만 여기 남은 친구들이 1년에 한두 번, 모내기, 벼베기할 때는 함께했던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요. 무슨 홈커밍데이 같은 느낌이죠. 저도 구례 살면서도 양수리 뒷골밭 친구들의 모내기, 벼베기에는 꼭 참여했었어요. 양수리 온 김에 자고 가기도 하고요. 양수리로 다시 돌아온 것은 사실상 올해부터인데, 구례 있으면서도 모내기를 한다, 잔치가 있다, 무슨 행사가 있다고 하면 계속 여기에 왔다갔다 했어서 사람들이 낯설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아직도 이쪽에서 농사짓는 친구들이 뭔가 끈을 놓지 않아도 되는 구심점이 되어 주었어요. 그 인연 덕분에 다시 양수리에 오게 된 거고요.


무척 신기해요. 이렇게 저렇게 두물머리에 흘러 들어와서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어떤 힘일까요? 자꾸 생각하게 돼요. 어떤 친구는 두물머리 미생물의 힘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농부의 힘이라고도 하죠. 같이 흙을 만지고 작물을 키운 것에 어떤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본 친구들이 너무 좋은 친구들이기도 하고요. 그래서일까요? 무엇이 되었든 이곳 친구들에게는 믿음이 있어요.


투쟁을 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잖아요. 어떤 불합리한 것에 함께 대항하는 거라 서럽고 힘든 일이 많았어요. 그런 일을 같이 겪은 것도 대단한 건데, 우리는 다른 투쟁에서는 하지 못하는 농사를 같이 지었잖아요. 그 힘든 시기에 흙을 만지고 제일 아름다운 두물머리에서 밭을 하면서 같이 농사를 지은 것, 그러면서 서로서로 쌓아간 믿음이 특별한 연대감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요.




Q. 구례는 어떻게 가시게 된 거예요?




당시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양수리, 두물머리에 오갔었거든요. 금요일에는 와서 자고 월요일 새벽에 출근하고 막 그랬던 삶이었어요. 그러다 투쟁이 끝났을 때, 진짜 탈서울을 해야겠더라고요. ‘나는 농사를 잘하니까 혼자 농사를 지어보고 싶어.’라고 생각한 거예요. 혼자 힘으로 농사를 지어보겠다고요. 그래서 여기저기 막 알아보고 해서 구례로 혼자 이주를 했어요. 일단 제가 1인 가구였으니까 결정도 수월했죠.


집하고 집에 딸린 300평 밭을 얻었어요. 그런데 1년 만에 이 300평 밭도 나 혼자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밭이 딱 마을 한가운데 있더라고요. 밭에서 풀이 자라서 풀씨 날리고 막 그러니까 이장님, 부녀회장님 등등 해서 여러 사람들한테 저희 집주인 아저씨가 무언의 압박을 받았나 보더라고요. 왜 혼자 사는 여자한테, 제대로 관리도 못하는 외지인한테 집을 주었느냐는 거였겠죠. 그래서 1년 만에 저도 죄송하다고 그러고 포기했어요.


내가 전에 직장이 도서관 사서여서 구례로 내려갈 때, 중고책방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처음부터 외지인이 중고책방을 여는 것이 좀 그랬어요. 나는 좀더 지역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처음 이주할 때는 읍 단위 정도에 많이 머무는데, 나는 처음부터 아주 외진 마을로 들어갔어요. 완전히 혼자였어요. 혼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300평 밭을 하다가 그만 두었던 거예요. 그때서야 농사를 혼자 짓지는 못하겠구나 싶었죠.


그래도 구례에서 햇수로 7년이나 있으면서 알음알음 아는 친구들이랑 지리산협동조합 같은 지원사업을 받아서 농사 프로젝트도 해보고 이것저것 많이 했어요. 자연농 관련 프로젝트도 해봤는데 물 하나도 안 대고 옛날 밭벼처럼 땅 파서 모 심고 키우는 농사예요. 그런 농사법으로 친구들이랑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 생계 수단이 아닌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 하던 차에 마침 지원사업에 선정이 된 거예요. 토종 볍씨로 자연농법으로 벼농사짓는 1년짜리 프로젝트였는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다들 직장인이라 바빠서 쉽지 않았어요. 결국 모두 흩어졌고 남은 친구 한 명이랑 둘이 계속했어요. 벼베기만 한 한 달은 했던 것 같아요. 모내기도 여기 파람이랑 알록이 와서 도와줬는데, 막 치를 떨고 갔었어요. 그래도 ‘재밌겠다. 이런 실험적인 것은 계속해 봐.’ 이렇게 응원해 주긴 했었지만요.


하지만 농사를 해보면 해볼수록 나는 농사꾼으로서 자질이 안 갖춰져 있는 거예요. 일단 농사를 지으려면 부지런해야 하잖아요. 매일매일 돌봐야 하는 것이 정말 많잖아요. 그런데 나는 너무 게으르고 농사꾼다운 자질이 너무 없는 거예요. 여기 호연이 같은 친구들은 보면 정말 잘하잖아요. 성실하고 끈기 있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밭에 가는 친구들이 있어요. 하긴 여기 있을 때는 나도 내 성정이 그런 줄 알았어요. 그때는 나도 그랬었거든요. 그래서 혼자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한 건데, 같이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밭에 가기가 싫은 거예요. 여기서는 농부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어서 같이 일하는 것이 좋았던 건데, 그걸 잘 몰랐던 거죠. 정말 농사꾼 체질인 줄 알고 혼자 내려갔다가 피를 본 거죠. (웃음)


그러는 사이에 구례에 책방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젠 책방도 아니다, 너무 늦었다 싶었어요. 그러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해봤던 거예요. 간간이 알바를 계속하기는 했죠. 그래도 구례에서 계속 살고 싶었으니까요. 어쨌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계속 생각했던 거예요.


그러다 비건 식당을 해보고 싶어서 뽀리뱅이라는 비건 식당을 차렸어요. 원래는 내가 농사지은 채소를 그날그날 판매하고, 그 외에 남은 것으로 요리를 하자는 계획이어서 매일매일 메뉴가 달라지는 콘셉트였어요. 그런데, 내 농사가 없으니까 주변에 친구들에게서 건강한 채소를 받았죠. 하지만 그것도 1년 만에 또 망해요.


뽀리뱅이는 회사인데,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았던 거예요. 우선 일회용 그릇을 쓰면 안 되니까 테이크아웃도 안 돼, 가게 안에서 휴지도 안 써, 모든 일회용품은 아웃! 그러고 보니까 이게 장난이 아니에요. 처음에는 취지나 가치가 좋고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그럴싸한 가게로 보였지만 혼자서 운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지치더라고요. 지역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응원해주고 지지해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가게도 많고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친구도 많으니까 어느 순간 지탄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게다가 나는 일주일에 4일 열고 3일은 준비했어요. 제가 하는 요리들이 밑간 준비가 많은 것들이었어요. 카레를 한다고 하면 양파, 토마토 같은 것을 하루종일 볶아놓고 소스 만들고, 야채 같은 것은 반나절 끓여야 하는 것이었는데, 가게 문을 열지 않으니 그런 게 보이지 않는 거죠. 딱 나오는 한 그릇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안다고 해도 아주 소수인데, 그 소수만으로는 운영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대충 말했죠. ‘살 만하니까 여기 와서 설렁설렁 그렇게 가게를 하지, 어려움이 없나 보네.’ 이런 거 있잖아요.


한 1년 버텼는데, 사람들은 몇 달만 더 버텨보면 대박이 날 거라고 응원했지만 카드값이 늘어났어요. 과감하게 할 수가 없었어요. 1년 6개월 만에, 2년 계약이었는데, 2년이 채 안 되어서 뽀리뱅이에 마지막 인사를 했어요. 그즈음에는 여기저기 인터뷰를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그런 인터뷰가 내 의사하고는 무관하게 여기저기 퍼지고 해서 상처를 좀 받기도 했죠.





Q. 구례의 가장 큰 문제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구례에는 원주민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1세대 귀농인라고 할까, 먼저 와서 터를 잡고 안정된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50대, 60대 정도 된 분들이죠. 그런데 그런 분들이 뭐랄까 하나의 카르텔을 이룩한 거예요.


그분들 중 어떤 분들에게 밉보인다고 하나? 그러면 살기가 힘들어져요. 신기하죠? 대신 그분들에게 잘 보이면 그분들이 영향력도 있고 정보도 있으니까 알음알음 소개도 해주고 홍보도 해주어서 뭔가 하기가 수월해져요. 그 반대의 경우에는 아주 힘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처럼 무너지고 떠난 청년들이 꽤 있긴 해요. 구례가 좁아요. 그래서 누가 왔다 그러면 한 다리만 건너도 다 알아요. 저도 다 알았어요.


귀농귀촌이라고 하면 정해진 편견이 있어요. 생태적인 삶, 안분지족, 안빈낙도 같은 거죠. 이런 지역까지 내려온 건 생태적인 삶을 살고 싶어서 아니냐. 조금 벌고 여유를 가지면서 살려고 하는 거 아니냐. 아등바등하지 않으려는 거 아니냐. 이런 자본주의 소비행태를 벗어나고 싶은 거 아니냐. 물론 나는 그 범주 안에 들어간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아주 다양한 이유로 내려올 수 있었어요. 2030 청년들이 많이 내려오던 시기였거든요.


그런데 ‘구례까지 와서 왜 그러고 사느냐!’ 같은 꼰대 발언이 나오고 그들이 부르는 술자리에 안 가고, 그들이 함께하는 사업이나 행사에 안 간다고 하면 벌써 밉보이는 거예요. 예를 들어 5일장이 서잖아요. 가보면 낯선 젊은 친구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꼰대 같은 아저씨들이 ‘쟤 뭔데, 왜 나한테 인사 안 해?’ 이러는 거예요. 저한테도 그런 얘기를 했다고 들었어요. 자기들이야 한 명 내려온 거니까 금방 알겠지만 나는 다 모르는 사람들뿐이잖아요. 어떻게 알고 인사를 하느냐고요. 나중에서야 건너건너 알게 되고 마주치면서 인사 정도는 하게 되었지만요.


그렇게 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상태에서 가게를 하니까 지역 사람들이 더구나 잘 안 오는 거죠. 나는 사실 그 가게가 뭐랄까 공용공간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구례 사는 친구들이 오가고 정말 채식으로 고기가 하나도 안 들어가지만 그렇게 맛있는 한 그릇 음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맛보여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역에서는 소외되고 도리어 여행객들이 많이 오게 되었던 거예요.


나만이 아니고 그런 분위기에 거부감을 갖는 친구들은 게스트하우스를 한다거나 에어비앤비를 한다거나 조그만 가게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친구들이 모여서 그룹이 형성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결국 운영이 안 되어서 다 망했어요. 한 명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또 한 명은 다른 지역으로 가고 나도 이쪽으로 왔어요.


그것이 내가 여기로 오게 된 계기예요. 친구들 곁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두물머리에서 연대하고 함께 농사짓던 친구들이 양수리에 터를 잡고 있잖아요. 물론 여기도 오며 가며 하다가 떠나간 친구도 있고 양수리를 벗어난 친구도 있고 멀리 해남으로 간 친구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 농부들이랑 농사짓는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친구들 곁으로 이렇게 왔어요.





Q. 이 지역의 장단점에 대해서 말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어디서 살든, 어떤 지역이든 이제는 함께하는 사람들, 그 관계가 제일 중요해요. 여기에서는 어느 정도 아는 관계, 믿는 관계가 있고 함께 무언가를 해나갈 수 있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것이 제일 안정적이고 편안한 거예요. 주변에 친구가 있다는 것이 제일 큰 장점이죠. 무엇이 되었든 이곳 친구들과는 믿음이 있어요.


단점이라면 지리적인 단점일까요? 아니면 콘텐츠가 부족한 것이랄까요? 여하튼 서울과 가까운 데도 교통이 너무 불편해요. 남양주나 부용리로만 들어가도 버스 노선 같은 것이 확 줄어요. 자가용이 있어야 이용이 가능해요. 문화적인 콘텐츠나 공연을 즐길 공간이 너무 부족해서 서울로 나가야 한다는 것 등등이 좀 아쉬워요. 걸어가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잖아요.


우리끼리 모이면 농담을 하곤 해요. “내가 로또만 되면 시네마 하나 만들어준다!” 영화관뿐이겠어요. ‘네 책방 하나 만들어준다.’ 이런 말도 하고 ‘네 가게 하나 열어준다.’ 이런 말도 하고요. 서로서로 하고 싶은 일에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려고 하다 보면 같이 영화 보기 프로젝트도 하고 스터디도 하고 밥도 먹고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Q. 실학박물관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실학박물관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내가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아서 잘 알지는 못해요. 그래도 네트워킹 파티 이야기는 들었고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원하는 건 계속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속가능한 만남이에요. 계속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교류할 수 있는 장이 있는 거예요. 그럴 수만 있다면 장터도 좋고 공부도 좋고 노는 것도 좋아요. 우선은 그런 기획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지속가능하려면 지역 사람들 자신이 해야겠죠.


지금은 ‘다람쥐’가 친구들 사이에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는데, 거기는 일단 생계 공간이니까 100%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거든요. 지나다가 잠깐 들르려다가도 일에 열중하고 있으면 방해가 될 수 있잖아요. 전에는 화요일 아침에 반찬 하나씩 만들어오는 모임을 했었대요. 아침에 좀 양을 많이 해서 반찬을 가져가서 다섯 명이 나누면 반찬 다섯 가지가 생기니까 1주일 반찬이 되잖아요.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죠. 두 달에 한 번 다람쥐에서 초하루장이 열리는 데 정말 좋아요. 그런 식도 괜찮죠.


지금 데레사언니가 부용리 부녀회장님인데, 마당장을 시작했어요. 동네 할머니들 나오시고 그 동네 주민들이 나와서 반찬 팔고, 막걸리도 같이 마시고 마을 잔치 같아요. 다들 좋아하세요. 마을마다 이런 장터가 있으면 좋겠어요. 시골 오일장처럼 소소하게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것이 교류와 연대의 장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사람들 관계에도 좋을 것 같고요.


양수리 2층에 공간이 났었대요. 술 마시면서 그 공간에서 무엇을 할지 중구난방 얘기해 봤어요. 그 공간을 얻어서 각자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거죠. 그런데 월세가 얼마냐, 그걸 n분의 1을 해볼까 했는데, 의견이 안 맞아요. 한 달에 얼마 이상은 무리다, 안 된다. 대부분이 경제관념이 없고 여유도 없어서 쉽지 않아요. 그래도 작당모의는 계속하겠죠. 다들 없이 살아서 그렇지, 이런 작당모의를 해서 무언가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신나게 참여하면서 좋아할 거예요.


저는 여전히 채식, 비건 음식들 만드는 것을 계속 해보고 싶고 중고책방, 중고세컨샵 같은 것에도 관심이 있어요. 물건을 사지 않고 소비하기 같은 거요. 요즘에는 친구들하고 얘기도 많이 하고 같이 달리기도 하면서 몸과 마음 두 가지 체력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작년 5월에 부용리 농막으로 이사해서 농부 친구들 밭에서 일했어요. 지금은 생협에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어요. 생협 활동가라기보다는 그냥 개인적인 경제활동에 가까워요.


그리고 올해는 뒷골밭에서 텃밭농사를 짓고 있어요. 그 밭은 그림책하는 파람이 짓던 건데 파람이 올해 밭을 그만두어서 대신 제가 하기로 했어요. 뒷골밭 친구들은 같이하는 공동밭이 있고 각자 짓는 개인밭이 있는데, 파람이가 짓던 개인 밭을 제가 혼자 지어보려고 맡은 거예요. 친구들이 오고 가는 밭이면 부담도 적고 주변에 아는 농부들도 있으니까 좀 편하죠. 저는 거기서 허브를 좀 많이 키워서 허브차를 브랜딩해 보려고 해요.



* 골몰하면서도 한가롭고, 용감하면서도 다정하며, 외곬이면서도 다성적인 이들이 모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찾고 길을 만들며 길을 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작당이 흥미진진하다. 그 길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 더 많이 산란하는 푸른 시선으로 기대하게 된다.






2025 실학박물관 지역활동가 아카이브 <모종의 발견>

조선 후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고민하던 학자들을 실학자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활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종의 발견>은 지역 곳곳에서 싹트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찾아 숨겨진 가능성과 가치를 세상에 알립니다.

글쓴이
실학박물관
자기소개
실학박물관은 실학 및 실학과 관련된 유·무형의 자료와 정보를 수집·보존·연구·교류·전시하며 지역 주민에게 교육과 정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다목적 차원의 문화복합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건립한 국내 유일의 실학관련 박물관입니다.